우리 마시는 차(茶) 안에 오렌지 녹아 있다고?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⑪ 홍차에 ‘오렌지 페코’(Orange Pekoe) 붙은 이유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오늘의 칼럼 주제는 오렌지다. 오렌지는 차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지만, 다음은 모두 사실이다.

● 찻잎 속에 오렌지 색소가 들어있다.
● 찻잎 속 오렌지 색소는 베타카로틴이다.
● 베타카로틴은 찻잎이 붉거나 노란색으로 변할 때 작용하는 성분이며 차의 향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 차나무를 일시적으로 차광(遮光)하면 베타카로틴 성분이 증가한다.
● 베타카로틴은 오렌지색 당근의 주성분이다.
● 당근은 원래 여러 색의 당근이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가 오렌지색 당근을 개발해 세계에 퍼뜨렸다.
● 네덜란드에서 오렌지색 당근을 개발한 이유는 독립전쟁에서 네덜란드를 이끈 ‘오렌지공화국’에 대한 존경과 사랑 때문이다.
● 홍차의 등급을 나누는 ‘오렌지 페코’(Orange Pekoe, O.P.)의 오렌지는 네덜란드를 지칭한다. O.P.는 홍차 캔(can) 표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오라녜공화국’(오라녜를 영어로 쓰면 오렌지이다)이 이끌었다. 1567년 빌렘 1세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오라녜공화국을 수립하며 초대 총독이 된다.

빌렘 1세의 사후에도 총독은 종종 오라녜 가문에서 나온다. 독립전쟁은 승리하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하며 계속되었다. 결정적인 전기는 1600년과 1607년 전투에서의 승리였고 상당 기간의 휴전 기간이 따른다.

독립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네덜란드는 1602년 출범한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무역을 통하여 세계 무역의 강자로 떠올랐다. 1620년에 전쟁은 재개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네덜란드는 80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며 독립을 쟁취한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수립된 1648년에 네덜란드는 독립국으로 인정된다.

세계 무역의 강자로 떠오른 네델란드 '오라녜' 왕가

독립전쟁 이후 오라녜 가문과 반(反)오라녜파의 갈등으로 네덜란드는 내분을 겪으며 분열을 거듭한다. 그래도 오랫동안 오라녜 공화국을 유지하였다. 1688년 영국이 제임스 2세를 쫓아내고 명예혁명을 이룰 때, 오라녜공화국 빌름3세(영국이름 윌리엄3세)는 영국을 다스리는 위치를 차지하는 등 독립국 네덜란드는 꽤 오래 강대국으로 군림한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네덜란드의 위치는 추락한다. 아시아 식민지 쟁탈에서 영국에 밀렸고,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며 영국의 분노를 샀다.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프랑스의 침공을 받아 빌럼5세가 추방되며 네덜란드 오라녜공화국 역사는 종지부를 찍는다.

나폴레옹 이후 오라녜-나소 가문은 왕위를 세습하는 오라녜-나소왕국을 세워 입헌군주제로 복귀한다. 아직도 오라녜 왕국이 존립하니 네덜란드는 현재에도 오렌지로 상징된다. 네덜란드 국가 스포츠팀이 지금도 국제 경기에서 ‘오렌지군단’으로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렌지색 당근도 네덜란드 육종의 산물이다. 당근은 본래 보라색, 노란색, 흰색, 검은색 등 다양한 색깔이 있었다. 오렌지색 당근은 오라녜 가문을 기리기 위하여 17세기 낙농 강국 네덜란드에서 새롭게 개발되었다. 현재 세계의 대부분 당근은 오렌지색이다.

오라녜공화국 시기 네덜란드는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여 유럽 각국에 공급하였다. 네덜란드가 유럽에 가져온 차는 처음에는 녹차와 청차였다. 곧이어 중국에서 홍차가 탄생하였고 홍차는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중국에서 차()를 수입해 유럽에 공급

이어지는 수 세기 동안 서양에서 차는 대부분 홍차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양으로 수입되는 홍차에는 마치 KS 마크처럼 ‘오렌지 페코’(O.P.)라는 말이 붙게 된다.

동서고금을 통해 찻잎은 차종에 무관하게 작을수록 사랑을 받았다. 우리 녹차에서 우전과 작설이 귀히 대접받는 현상과 같다.

찻잎은 작을수록 싹에 가깝고 작은 찻잎은 표면에 흰 털을 가진다. 흰 솜털은 애벌레가 찻잎을 갉아 먹는 것을 막아 주는 장치이다.

찻잎의 흰 솜털을 중국인은 ‘백호(白毫)’라 불렀고 차를 처음 수입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페코(pekoe)를 작은 찻잎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페코 앞에 근사하게 오렌지를 붙여 “네덜란드 오렌지공화국이 인정하는 작은 찻잎”이란 의미를 담은 홍차를 유럽 각국에 풀었다.

영국인들이 차를 마신 17세기 후반부터 홍차는 주로 영국에 의하여 수입되어 유럽 각국으로 배달되었다. 이후 영국에서는 많은 홍차 회사들이 탄생하였고 이 홍차가 각국으로 수출되었다.

포트넘앤메이슨 혹은 트와이닝 같은 홍차 회사들이 판매하는 홍차 캔에도 작은 찻잎으로 제작되었다는 선전 문구는 여전히 ‘오렌지 페코’이다. 이제는 더 이상 오렌지공화국이 보장하는 찻잎은 아니더라도 ‘오렌지 페코’는 작고 질이 좋은 찻잎을 의미한다.

오렌지 페코, "작고 질이 좋은 찻잎"이란 의미로 널리 쓰여

현재, 홍차 찻잎의 등급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가지의 가장 끝부분으로 찻잎이 펴지기 전의 상태를 ‘팁’(Tip [Flowery orange pekoe, FOP]), 팁의 바로 아래에 있는 두 번째 어린잎을 ‘오렌지 페코’, 그다음의 세 번째 어린잎을 ‘페코’라 한다.

네 번째, 조금 두꺼운 어린잎을 ‘페코 소총’(Pekoe Souchong 혹은 Pure Souchong, 소총은 중국어로 작은 잎이라는 의미), 그다음 다섯 번째, 두껍고 큰 잎을 ‘소총’으로 부른다. 하지만 찻잎이 작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부사와 형용사를 여럿 붙이기도 한다.

[일러스트=손경희]
당근에서 오렌지색은 베타카로틴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카로티노이드는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계통의 과일과 채소에 많이 함유된 식물 색소이다.

베타카로틴은 카로티노이드의 하나로 강력한 항산화제이다. 암과 심혈관 질환의 위험을 낮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태양광에 의한 피부 손상을 보호하고, 주름이나 검버섯 생성을 막아 준다.

이로 인해 노화 지연 효과까지 나타낸다. 그리고, 당뇨병 합병증을 예방해주고, 폐 기능을 증진하고, 항균 작용까지 한다고 알려진 유익한 성분이다. 베타카로틴 덕에 당근은 건강에 유익한 채소라는 믿음을 얻었다.

베타카로틴은 찻잎 속에도 존재한다. 초록 찻잎 속에 숨어 있는 오렌지색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찻잎 색이 붉은색이나 노란색으로 변할 때는 베타카로틴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다.

특히 베타카로틴은 대사(代射)되어 방향족 화합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화합물은 ‘베타이오논’이다. 이는 꽃과 과일의 향기 성분의 하나. 제비꽃, 장미꽃, 복숭아, 살구, 감귤류 등에서 신선하고 상큼한 향을 낸다. 흙냄새도 약간 난다.

찻잎에 들어있는 베타카로틴, 오렌지색 당근과 연결

특이하게도 차나무에 빛을 가려주면, 베타카로틴 성분이 증가한다. 이런 연구는 겨우 2년 전 발표되었다.

일본에서는 차광(遮光)하여 딴 찻잎으로 차를 만든다. 2주 정도 차광하여 교쿠로차(옥로차)를, 1주 정도 차광하여 카부세차를 제작한다. 이 차들은 모두 감칠맛이 뛰어나고 달콤한 향을 낸다.

지금까진 이 차들의 독특한 맛과 향이 차 아미노산, 테아닌이 차 폴리페놀, 카테킨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차광으로 억제한 덕에 나타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차광으로 베타카로틴 성분도 높아진다니, 이들 차의 맛과 향기 일부는 베타카로틴에서 비롯될 수 있다.

차 애호가들은 차를 마시면서 수많은 향기를 맡는다. 난향, 꽃향, 과일향, 연향, 훈연향, 조향, 묵향 등. 이런 향기 속에 베타카로틴이 대사되어 내는 향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차인(茶人)들이 모르고 있었다.

베타카로틴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알고 난 후 나는 차를 마실 때마다 베타카로틴의 흔적을 느끼려 후각을 곤두세웠다. 이런 집중이 거듭되니 갑자기 차에서 당근 향이 맡아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나를 세뇌한 결과인가 싶다. 후각은 본래 주관적 감각이라는 사실이 이번 경험으로 한 번 더 입증되었다.

찻잎 속 베타카로틴의 존재와 기능은 최근에야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공화국 덕에 찻잎 묘사에 쓰인 단어 ‘오렌지’는 찻잎 내 베타카로틴의 맛과 향을 이미 알리고 있었다.

유영현 부산 엘앤더슨병원 진료원장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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