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의 브라이튼 앤 서섹스 의대와 로열 서섹스 카운티 병원 연구진은 18세기 무면허의사이자 아마추어 발명가였던 프랜시스 하욱스비 더 영거(1687~1763)가 1743년 발행한 팸플릿 '엑스페리멘툼 크루치스(Experimentum Crucis)'에 임상시험에 대한 최초의 구상이 담겨 있다고 보고했다. 라틴어로 '교차 실험'을 뜻하는 이 팸플릿에 적힌 내용이 이후 임상시험의 원형이 됐다는 것.
하욱스비 더 영거는 17세기 전기 및 정전기 연구로 유명한 과학자 프랜시스 하우크스비 디 엘더(1660–1713)의 아들로 공기 펌프, 정수압 저울 및 반사 망원경 같은 과학기구 제작자이자 과학강사였다. 그가 배포한 '하욱스비 씨 대체 의학의 효과에 대한 추가 설명'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에는 성병 치료제의 '안전성과 효능'을 평가하기 위해 자신의 치료법을 다른 사람의 치료법을 비교하는 것을 목표로 통제된 실험을 실시하자며 구체적 방법론까지 제시됐다.
성병 진단을 받은 12명의 환자를 선정해 6명의 환자는 하욱스비의 약물을 투여 받고, 6명의 환자는 다른 의사들이 실시하는 기존의 표준 치료들을 받아 그 효과를 비교하자는 것. 또 혼란 요인을 최소화하기 위해 식단과 숙박과 같은 변수를 통제하자는 내용도 들어있다. 수감자를 대상으로 한 당시 의학 실험 관행에 반대하며 환자의 동의 아래 시행돼야 하며 환자의 진행 상황을 검사하고 확인하기 위해 독립적인 관찰자를 초대해 그 결과를 저널에 발표하자는 내용도 담겼다.
18세기 의사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임상시험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현대 독자에게 광고 카피에 가까운 의견서와 후기를 신문에 게재했다. 당시는 에탄올에 용해된 아편 추출물이 인후통, 감기, 기관지염, 결핵에 대한 해독제로 판매되고 수은과 비소와 같은 독성 물질과 독미나리 같은 독초가 의학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하욱스비는 수은 기반 타액 요법에 의존하는 기존 치료법과 자신이 개발한 비수은 대체 약물의 효과를 비교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이다. 특히 치료효과의 지속성 여부를 가리기 위한 장기 관찰의 중요성과 결과에 대한 평가가 독립적이고 편견 없이 이뤄져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구상이 실제로 이뤄졌음을 시사하는 증거는 없다. 영국 의료계가 의사면허증이 없던 하욱스비의 제안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욱스비는 수학, 해부학, 화학에 대한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정식 의학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구상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747년 제임스 린드의 괴혈병 임상시험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린드의 연구는 12명의 선원을 대상으로 괴혈병에 대한 6가지 치료법을 비교해 최초의 근대적 임상시험으로 간주되고 있다.
연구진은 환자의 동의, 통제된 조건, 대조군과 비교, 독립적인 감독, 결과의 투명한 공개가 포함된 하욱스비의 제안이 나중에 린드의 연구와 주요 방법론적 유사점을 공유한다고 지적했다. 의학에 체계적인 원리를 적용하려 한 하욱스비의 구상이 린드의 획기적 연구를 위한 지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것이 연구진의 결론이다.
해당 논문은 다음 링크(https://royalsocietypublishing.org/doi/10.1098/rsnr.2024.0033)에서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