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올리기 전 좌초할 뻔했던, 미래의학 이끌 학회는?
[Voice of Academy-학회열전] 대한가정의학회 설립 배경
회원 1만1000명의 대형 학회인 대한가정의학회는 40여 년 전 출범에 실패해 좌초할 뻔했다. 풍랑 속에서 닻을 올리고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은 연세대 의대에서 최연소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딴 선각자 의사와 서울대 1회 졸업생이었던 서울대병원장 덕분에 가능했다. 그 뒤에는 한국을 사랑했던, 미국 미네소타대의 의학자가 있었다.
미국 중북부 미네소타 주의 이름은 원주민 다코타족이 주를 가로질러 미시시피강으로 흐르는 강을 ‘흰거품 물’ 또는 ‘하늘 빛을 띤 물’이란 뜻의 ‘미니 소타(Mini Sota)’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 1959년 봄 두 강이 만나는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미네소타대 의대의 소아과 과장실. 존 앤더슨 교수가 엘던 버그런드 교수를 불러 말했다. 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았던 한국으로 가줘야겠다고.
미네소타대는 6·25 전쟁 이후 무너진 고등교육을 살리기 위해 ‘선택과 집중’에 따라 서울대 재건부터 도와달라는 문교부(교육부)의 요청을 미국 정부가 받아들여 유무형의 시스템을 전파하고, 한국의 젊은 교수들을 초청해 선진 학문을 가르쳐준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본거지였다.
버그런드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울대 의대와 병원의 자문의사로 선발돼 서울로 향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료진을 도우다 4.19 혁명까지 함께 겪으며 ‘뜨거운 친한파’가 됐다. 그는 한국에서 의사는 단순히 치료만 잘 해선 안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통합적으로 환자를 보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미네소타대 가정의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헤네핀 카운티 병원에 가정의학과를 설립했다.
버그런드는 1974년 문교부가 세계은행(IBRD)에 교육차관을 신청했을 때 평가위원 3명 가운데 한 명으로 또 다시 내한,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 등을 방문해 “한국은 가정의학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연세대를 방문했을 때 예방의학과의 젊은 조교수와 우연히 만났다. 연희동 판자촌에서 지역의학 시범사업을 하던 윤방부였다. 윤 교수는 ‘물, 불, 길의 세 가지가 없는 3무 동네’에서 빈민을 치료하려면 전공 하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은행 차관 심사위원으로부터 “이런 문제를 함께 해결할 전공이 있는데 그것이 가정의학”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한국에 가정의학 뿌리 내린 美 버그런드 교수
버그런드는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에는 가정의학이 절대로 필요하며 서울대나 연세대 교수를 보내면 가정의학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했고, 윤방부 교수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연수생으로 선발됐다. 윤 교수는 미네소타 공항에서 교수가 직접 자신을 마중 나온 것에 놀랐고, 그 교수가 바로 ‘그때 차관 심사위원’이었다는데 충격을 받았다.
윤 교수는 스승이 자신에게 의대 4학년 과정부터 밟으라고 하자 자존심이 상해 버텼지만, 버그런드는 “먼 훗날 이것이 기회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며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했다. 스승은 동양인 제자가 의대를 졸업하고 3년 수련을 마치는 과정에서 난관마다 방패막이 돼주거나 뒤에서 지원했다. 윤 교수는 수련을 마치고 미국 병원들의 가정의학과 운영 사례를 살피고 귀국했지만 설 자리가 없었다. 그는 연세대 예방의학과 교수로 복귀해서 ‘가정의학의 전도사’가 됐지만 가는 곳마다 ‘정신 나갔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스승은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것일까. 버그런드 교수는 1978년 서울대병원 신축 행사 때 내한해 가정의학의 필요에 대해 열강을 펼쳐 홍창의 교수의 마음을 빼앗았다. 홍 교수는 서울대 의대 1회 졸업생으로 국내에서 소아백혈병, 소아심장학의 토대를 닦았다.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1987년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의사들이 만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초대 이사장을 맡기도 한 지행합일의 의학자이기도 했다.
홍 교수는 1955년 미네소타 프로젝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소아과에서 연수하며 이미 가정의학을 눈여겨 보았는데, 버그런드의 강의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가정의학에 대해 독학하고 미니애폴리스로 현장실습을 다녀온 뒤 가정의학 후원자를 자처했다. 홍 교수는 1979년 부원장으로서 가정의학과를 설립하고 과장을 겸임했다. 버그런드는 이 무렵 건강 때문에 서울에 올 수 없자 세인트 폴 램지 병원 가정의학과의 빈센트 헌트 과장을 보내 한 달 동안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수련과정, 외래 개설과 운영 계획 등에 대해 검토하게 도왔다.
홍 부원장은 한양대병원에서 심장초음파 권위자로 이름을 떨치던 허봉렬 교수를 스카우트해 가정의학과 전담 과장을 맡기고 김기락, 박명식, 김철헌 세 명의 가정의학과 전공의를 선발했다. 가정의학 전문의는 연세대에서 먼저 배출했지만, 가정의학과는 서울대에서 먼저 생긴 것이다. 이런 소식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젊은 의사들과 대중의 호응을 받았지만 기존 의사들은 극렬히 반대했다. 전문의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인데 어떻게 전체를 보는 의사가 전문의가 될 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서울대병원에서 진료과를 만들고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전공을 인정할 조짐을 보이자 병원협회와 각종 학회에서 반대 궐기대회를 열기까지 했다.
“제가 있던 병원의 백낙환 이사장께서도 당시 머리띠를 메고 궐기대회에 참석했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나중엔 서울백병원, 상계백병원, 일산백병원 등 병원마다 가정의학과 교수를 우선 채용하면서 이 과를 중시했어요. 가정의학과가 자리잡는 데에는 ‘환자들 처지’를 강조하며 의사들을 설득한 윤방부 교수의 공도 컸고, 인격과 실력으로 의료계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홍창의 원장의 추진력 덕분이기도 했지요.” -강재헌 대한가정의학회 이사장(강북삼성병원 교수)
1980년 창립총회...홍창의·윤방부·허봉렬 등 성장 토대 닦아
홍 부원장과 윤 교수는 1979년 12월에 당시 가정의학과 연수교육을 받던 수강생들과 함께 가정의학회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었고, 이듬해 1월 72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회장 홍창의, 부회장 윤방부 체제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그해 11월부터 매월 학술지 《가정의》를 발행했고, 다음해에는 제2차 정기총회 겸 첫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회칙을 회장 중심에서 이사장 중심으로 바꾸며 윤방부 교수를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학회는 1983년 5월 세계가정의학회에 30번째 정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985년 마침내 정식 학회로 인정받았고 서울대병원 8명, 연세의료원 16명, 영남대병원 전주예수병원 각 1명씩 모두 26명의 가정의학 전문의를 배출했다.
학회는 윤방부 교수의 10년 이사장 시기를 이어 허봉렬 교수와 고려대 홍명호 교수가 번갈아 두 번씩 이사장을 맡으며 성장의 토대를 닦았다. 1990년 대한의학회의 정회원 학회로 승인받았으며 1997년과 2012년 세계가정의학회(WONCA) 아시아태평양지역 학술대회에 이어 2018년 10월 서울 코엑스에서 110개국 3000여 명이 참가한 WONCA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가정의학은 국민 건강지식 보급, 의학정보 교육 등이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전문의들이 대중 홍보 활동에 앞장서면서 수많은 스타의사들이 탄생했다. 공적 영역과 정치 영역에서 활약하는 전문의도 다른 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정은경 전 질병관리청장, 서홍관 전 국립암센터 원장 등이 가정의학과 전문의이고 국회의 22대 인요한, 21대 이용빈, 신현영 의원 등도 일차의료 책임자였다.
“2018년 서울 WONCA에선 일차의료 강화를 통한 세계인의 건강증진을 강조하는 ‘서울선언문’을 선포했고 이를 계기로 전국민 주치의 갖기 캠페인이 출범했어요. 이번 의정갈등 때 국민들은 주치의 중심의 일차의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습니다. 미래 디지털헬스 시대에는 주치의가 더욱 더 중요해질 겁니다. 의료개혁특위에서도 주치의 중심의 의료시스템에 대해 논의가 무르익었는데, 정치적 격번 탓에…. 하루 빨리 환자를 생각하고 의료가 정상화돼야 할 텐데 안타깝습니다.” -강재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