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자가 단 한 명뿐이라도 약을 만들 수 있을까. 미국 정부가 이 질문에 돈으로 답했다.
미국 정부가 환자 수가 너무 적어 제약사들이 외면해온 희귀 유전질환에 5년간 최대 1억6000만달러(약 2200억원)를 투입한다. 질환마다 약을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대신, 공통 유전자편집 기술을 하나 갖춰놓고 환자의 유전자변이에 맞춰 설계 일부만 바꾸는 방식이다.
미국 보건부 산하 혁신 연구기관인 보건의료고등연구계획국(ARPA-H)이 지난 9일 희귀 유전질환 맞춤형 치료제 개발 사업 'THRIVE'에 참여할 연구팀 7곳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단계별 목표를 달성해야만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환자가 적으면, 약도 없다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선 이유는 희귀질환 치료제 시장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현재 알려진 희귀질환은 1만개가 넘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치료제가 있는 질환은 약 5%에 그친다. 미국에서만 희귀질환 환자가 2500만∼3000만명에 이르지만, 질환별로 나누면 환자가 수십 명이나 수백 명뿐인 사례가 많다.
환자가 적으면 임상시험 참여자를 모으기부터 힘들다. 약을 개발해도 시장이 작아 투자금 회수가 불투명하다. 제약사들이 극소수 환자를 위한 개발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기존 신약개발 과정도 걸림돌이다. 질환 하나마다 후보물질을 만들고 안전성 시험과 제조공정 개발, 임상시험, 허가 심사를 각각 거쳐야 한다. 그런데 환자가 몇 명뿐인 질환마다 이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면 비용과 시간을 감당할 수 없다.
약 대신 '엔진'을 만든다
THRIVE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목표는 특정 희귀질환 치료제 한두 개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러 유전질환에 두루 쓸 공통 기술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연구팀은 유전자를 고치는 편집 기술, 이를 목표 장기까지 전달하는 운반체, 제조공정을 하나의 세트로 함께 개발한다. 이후 질환이나 환자의 유전자변이에 따라 편집 위치와 설계 일부만 바꿔 다음 치료제를 만든다.
환자마다 약을 완전히 처음부터 만드는 방식과는 다르다. 공통 뼈대는 유지하고, 질환에 맞춰 핵심 부분만 바꾸는 쪽에 가깝다.
ARPA-H는 이를 여러 정밀 유전의약품을 만들어내는 '엔진'에 비유한다. 치료제마다 모든 과정을 다시 밟는 대신, 앞서 검증한 운반체와 제조법, 안전성 자료를 다음 치료제에 그대로 활용해 개발 기간과 비용을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사업의 중심은 편집 물질을 환자의 몸속에 직접 넣어 유전자를 고치는 '생체 내 유전자편집'이다. 유전자를 고친 세포를 몸 밖에서 배양한 뒤 다시 넣는 치료보다 과정이 단순할 수 있다. 다만 원하는 장기에 편집 물질을 정확히 전달하는 일은 과제로 남는다.
대상 질환에는 희귀 대사질환과 혈액질환, 면역질환, 유전성 피부질환 등이 포함됐다. 필라델피아아동병원 연구팀은 희귀 대사·혈액질환 치료 플랫폼 개발에 최대 3900만달러를 지원받는다.
ARPA-H는 이미 효과를 확인하고 이번 투자에 나섰다. 환자 한 명만을 위해 만든 유전자편집 치료제가 실제로 통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국 필라델피아아동병원과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2025년 희귀 대사질환을 앓던 영아 'KJ'를 위해 맞춤형 크리스퍼 유전자편집 치료제를 만들었다. KJ는 몸속의 독성 암모니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중증 유전질환인 카바모일인산합성효소1(CPS1) 결핍증을 앓고 있었다. 연구진은 아이에게서 발견된 유전자변이에 맞춰 약을 설계했고, 2025년 2월 처음 투여했다.
환자 개인을 위해 만든 유전자편집 치료제를 전신에 투여한 사례는 환자 한 명을 위한 약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다만 설계와 제조, 안전성 검토, 규제기관 협의를 모두 새로 거쳐야 했다. 다른 환자에게 이 과정을 그대로 되풀이하기엔 비용과 시간의 벽이 너무 높았다.
THRIVE는 이 같은 일회성 성공을 여러 질환에 적용할 수 있는 체계로 바꾸려 한다. 앞서 3900만달러를 지원받은 필라델피아아동병원 연구팀이 KJ를 치료했던 주역이다.
실패해도 국가가 책임진다
이 기술을 완성한다고 곧바로 환자에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환자가 한 명이나 극소수인 질환은 수백∼수천명을 모집하는 일반 임상시험을 진행하기 어렵다.
FDA는 지난 2월 초희귀 유전질환 맞춤형 치료제에 적용할 새로운 심사 틀을 제시했다.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치료제에서 얻은 제조·안전성 자료를 다른 맞춤형 치료제 심사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6월에는 기존 유전자편집 치료제에서 쌓은 지식을 다음 치료제 개발에 활용하는 방안을 담은 별도 지침 초안도 발표했다. 같은 전달체나 편집 기술을 반복해서 쓸 때 모든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마련해야 하는 부담을 줄이려는 조치다. 물론 유전자편집의 안전성 기준을 낮추겠다는 뜻은 아니다. FDA는 의도하지 않은 부위까지 함께 편집되지는 않았는지 차세대 유전체 분석으로 확인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THRIVE 연구팀은 여러 치료제를 함께 평가할 수 있는 임상시험 설계와 허가 경로도 마련해야 한다. 약 하나를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고, 다음 환자의 치료제를 더 빨리 개발할 제도까지 갖추는 것이 목표다.
ARPA-H는 운영방식부터 다른 조직이다. 미국 국방 분야의 고등연구계획국(DARPA) 방식을 보건의료에 그대로 옮겨왔다. 실패 확률이 높더라도 성공하면 의료체계를 통째로 바꿀 수 있는 연구를 골라 집중적으로 밀어준다. 사업관리자가 직접 목표와 기한을 정해두고 진행 상황을 점검하다가, 성과가 미치지 못하면 지원 규모든 연구 방향이든 바꿔버린다.
ARPA-H는 기존 연구지원 제도나 산업계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고 복잡하며 위험한 보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기관의 역할로 삼는다. 특정 질환 하나보다 여러 질환에 두루 쓸 수 있는 기술을 우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초희귀질환 치료제는 기술적 가능성은 열렸지만 시장 논리만으로 개발하기 어려운 대표 분야다. 미국 정부가 치료제 한두 개보다 여러 약을 계속 만들어낼 공통 기술에 자금을 대는 이유다.
'한국형 ARPA-H 프로젝트' 운영
한국도 2024년부터 미국 ARPA-H를 본뜬 '한국형 ARPA-H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이 감염병과 암, 희귀질환, 초고령사회, 필수의료 같은 보건 난제를 대상으로 연구사업을 추진한다. 일반적인 연구과제보다 실패 위험은 크지만, 성공하면 파급효과가 큰 기술을 선정한다. 사업관리자가 연구 방향과 성과를 관리하는 임무 중심형 사업이라는 점도 ARPA-H와 닮았다.
2024년에는 백신 초장기 비축과 우주의학, 근감소증 치료 기술 등이 과제로 선정됐다. 2026년에는 10년 이상 보관할 수 있는 백신과 인공지능 암 관리, 고령층의 통증·가려움 측정 기술 등 9개 신규 프로젝트가 제시됐다.
다만 한국형 ARPA-H는 미국처럼 독립 기관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환자별 맞춤 유전자편집 치료제를 여러 희귀질환에 반복 적용하는 대규모 사업은 아직 없다.
시선을 다시 미국으로 돌리면, 이 사업 역시 장밋빛만은 아니다. 넘어야 할 문턱은 많다. 유전자편집이 엉뚱한 부위에 영향을 미칠 위험, 장기 안전성, 높은 제조비용, 보험 적용 문제까지 풀어야 할 과제가 쌓여 있다.
방향만은 분명하다. 환자가 적다는 이유로 등 돌렸던 구조를,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바꾸려 한다. 한 아이를 살리려고 개발한 치료제 하나가 언젠가 다음 아이에게도 닿을 수 있을까. 이번 사업의 성패는 여기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