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원래 '길치'잖아."
엄마가 자주 하는 하소연이다.
그녀는 몇 번 간 백화점인데도 주차장에서 세워둔 차를 못 찾고 한참 돌기 일쑤다. 나이 탓이려니 했다.
그런데 이런 감각은 사실 뇌가 보내는 가장 이른 경고일 수 있다.
방향 감각이 흔들리면, 뇌 안쪽도 흔들린다
방향 감각 저하가 치매 초기 신호일 수 있다는 연구는 계속 늘고 있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간 결과가 나왔다. VR(가상현실) 헤드셋을 쓰고 짧은 검사만 받으면, 1년 뒤 뇌 피질이 얼마나 빨리 얇아질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후지타 건강대 신경과 연구팀은 기억력과 인지 기능이 정상인 성인들에게 3D VR 헤드셋을 씌웠다. 가와바타 선임조교수와 와타나베 교수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주변 단서 없이 가상 공간에서 출발 지점을 찾아 돌아오는 과제를 줬다.
결과는 명확했다. 처음 길을 자주 잃었던 사람들은 1년 뒤 다시 찍은 뇌 영상에서 실제로 뇌 피질이 더 빨리 얇아졌다. 뇌 피질이 빠르게 얇아질수록 기억·판단 기능 저하 위험도 커진다.
왜 하필 VR 길 찾기인가. 방향 감각을 맡는 곳이 바로 내후각 피질인데, 알츠하이머 손상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영역이다. 내후각 피질에는 격자 세포가 있다. 몸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움직였는지 기억해 현재 위치를 계산하는 세포다.
기억력이 무너지기 훨씬 전부터 내후각 피질이 먼저 손상된다. VR 길 찾기 오류는 그 손상이 겉으로 드러나는 신호다.
이상 없다는 검사 결과, 믿어도 될까
이번 연구에서 지금 뇌 상태가 멀쩡해 보여도 1년 뒤 실제로 뇌 피질이 더 빠르게 얇아진 사람들이 VR 검사로 포착됐다.
기억력이 멀쩡할 때, 아직 이상을 느끼기 전에 뇌 피질이 얇아지는 속도를 미리 알 수 있다. VR 점수가 낮을수록 혈액 속 신경퇴행 지표도 함께 나빠졌다. 이런 결과는 바로 내 엄마 얘기일 수 있다.
조기 발견이 보다 중요해진 이유가 있다. 2023년 레켐비(성분명 레카네맙), 2024년 키순라(성분명 도나네맙)가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으면서 알츠하이머 진행을 늦추는 치료제 시대가 열렸다.
다만 두 약 모두 치매 초기 단계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증상이 더 진행되면 투약 대상에서 제외된다. 발견이 이를수록 치료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 연구 결과는 최근 국제 학술지 《Alzheimer's Research & Therapy》에 게재됐다.
길치라고 치부하기 전에
VR 치매 검사는 국내외 임상에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2019년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이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열었다. VR 길 찾기 검사가 기존 인지 검사보다 알츠하이머 고위험 환자를 더 정확히 가려낸다는 결과였다. 이후 7년간 검증이 쌓이면서 임상 적용이 가까워지고 있다. 수년 안에 신경과나 건강검진 센터에서 받을 수 있게 될지 모른다.
현재 치매 조기 발견은 수백만 원대 아밀로이드 PET 촬영이나 척추에 바늘을 찌르는 뇌척수액 검사에 의존한다. VR 검사는 헤드셋을 쓰고 짧은 과제 하나를 수행하면 끝난다.
"나는 원래 '길치'야."
주변에선 예전부터 나왔던 자기비하라고 넘기기 쉽다.
하지만 방향 감각은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갑자기 나빠지지 않는다. 기억보다 먼저 길 찾기가 어려워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뇌가 보내는 신호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