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년 전 심장에 넣은 인공판막이 다시 좁아진 89세 환자가 가슴을 여는 재수술 대신 카테터로 새 판막을 넣었다. 서울성모병원 의료진은 새 판막을 펼칠 때 심장혈관 입구가 막히지 않도록 기존 판막의 얇은 막을 미리 절개하는 새 기법도 함께 썼다.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은 심뇌혈관병원 장기육 순환기내과 교수팀이 지난 22일 89세 여성에게 ‘라마콘(LLAMACORN)’ 기법을 이용한 경피적 대동맥판막 삽입술(TAVI) 재시술을 했다고 29일 밝혔다. 한국에서 라마콘을 적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번 넣은 인공판막도 다시 좁아질 수 있어
대동맥판막은 심장에서 온몸으로 나가는 혈액이 지나는 문이다. 노화 등으로 판막이 딱딱하게 굳고 좁아지면 심장이 피를 내보내기 어려워진다. 숨이 차거나 가슴이 아플 수 있고, 어지럼증이나 실신이 나타나기도 한다. 심하면 생명을 위협한다.
과거에는 가슴을 열고 손상된 판막을 바꾸는 수술이 주된 치료법이었다. TAVI는 대개 허벅지 혈관으로 가느다란 관을 넣어 좁아진 대동맥판막 안에 인공판막을 펼치는 시술이다. 가슴을 열거나 심장을 멈추지 않아 고령자와 수술 위험이 큰 환자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다만 인공판막도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 조직이 닳거나 굳으면 다시 좁아질 수 있다. 이때 기존 인공판막 안에 새 판막을 겹쳐 넣는 치료를 ‘밸브 인 밸브’ 재시술이라고 한다.
이번 환자도 6년 전 TAVI를 받았지만 인공판막에 퇴행성 변화가 생기면서 대동맥판막이 다시 심하게 좁아졌다. 처음 넣은 판막의 크기도 비교적 작아, 의료진은 혈액이 더 원활하게 흐를 수 있는 새 판막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새 판막 넣다가 심장혈관 입구 막힐 수도
문제는 재시술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관상동맥 폐쇄다.
새 판막을 기존 판막 안에서 펼치면 낡은 판막의 '판막엽'이 위로 젖혀질 수 있다. 판막엽은 판막에서 문짝처럼 열리고 닫히는 얇은 조직이다.
대동맥판막 바로 위에는 심장근육에 피를 공급하는 관상동맥 입구가 있다. 위로 밀린 판막엽이 이 입구를 덮으면 심장으로 가는 혈액이 갑자기 끊길 수 있다. 심근경색이나 심정지로 이어질 수 있는 치명적인 합병증이다.
이번 환자는 왼쪽 관상동맥 입구가 비교적 낮았다. 새 판막을 그대로 넣으면 기존 판막엽이 혈관 입구를 가로막을 가능성이 컸다. 의료진은 새 판막을 넣기 전에 판막엽을 갈라 피가 흐를 길부터 만들기로 했다.

낡은 판막엽 먼저 갈라 혈액길 확보
라마콘은 기존 인공판막의 판막엽을 미리 갈라 놓는 기법이다.
먼저 고주파가 흐르는 바늘로 판막엽에 작은 구멍을 낸다. 그 안에 풍선을 넣어 단계적으로 부풀리면 압력을 받은 판막엽이 양쪽으로 갈라진다. 이후 기존 판막 안에 새 인공판막을 펼친다.
이번에는 몸 안에서 스스로 펼쳐지는 ‘자가확장형 판막’을 사용했다. 갈라진 판막엽 사이로 관상동맥에 피가 흐를 공간을 남겨 혈관 입구가 막힐 위험을 낮추는 원리다.
기존에도 판막엽을 처리하는 방법은 있었다. ‘바실리카’는 전기가 흐르는 와이어로 판막엽을 직접 가른다. 다만 와이어를 판막엽의 정확한 위치에 통과시켜야 해 시술 난도가 높다.
뒤이어 나온 ‘유니콘’은 판막엽에 구멍을 내 혈액 통로를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새로 넣을 수 있는 판막의 종류에 제약이 있었다.
라마콘은 작은 구멍만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풍선으로 판막엽을 더 넓게 가른다. 쓸 수 있는 인공판막의 폭도 넓다. 환자의 심장 구조와 기존 판막 크기에 더 알맞은 판막을 고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라마콘의 첫 인체 적용 사례는 호주 연구진이 2024년 국제학술지에 보고했다. 아직 적용 사례가 많지 않은 초기 단계의 고난도 시술인 만큼 장기간의 안전성과 효과를 판단하려면 추가 자료가 필요하다.
시술 다음 날 혈류속도 절반 이하로
장 교수팀은 라마콘으로 기존 판막엽을 가른 뒤 자가확장형 판막을 삽입했다.
시술 다음 날 심장초음파 검사에서 대동맥판막을 지나는 혈류의 최고속도는 초속 4.6m에서 2.1m로 낮아졌다. 판막이 좁으면 피가 좁은 틈을 빠르게 지나면서 속도가 높아진다. 속도가 크게 떨어졌다는 것은 새 판막을 통해 피가 한층 원활하게 흐른다는 뜻이다.
장 교수는 “판막엽을 인위적으로 파괴해 혈류 통로를 확보하는 라마콘은 이러한 위험을 원천적으로 낮출 수 있어, 이런 환자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첫 TAVI는 건보 확대…재시술 부담은 남아
TAVI는 고가의 인공판막을 쓰기 때문에 건강보험 적용 여부에 따라 환자 부담이 크게 달라진다.
현재 수술이 불가능하거나 위험이 큰 중증 대동맥판막 협착증 환자는 건강보험 급여를 받을 수 있다. 수술 위험이 중간 정도인 환자는 진료비의 50%, 위험이 낮은 환자는 80%를 부담하는 선별급여가 적용된다. 2022년 급여 범위가 넓어지면서 적응증에 맞는 고령 환자의 첫 TAVI 비용 부담은 크게 줄었다.
다만 현행 기준은 TAVI를 원칙적으로 한 차례만 건강보험으로 인정한다. 기존 인공판막이 손상돼 두 번째 TAVI가 필요한 환자는 치료 선택지가 생겨도 비용 부담이 클 수 있다. 고령층의 TAVI 시술이 늘고 생존 기간도 길어지면서 재시술 급여 기준 조정도 앞으로 검토할 과제로 꼽힌다.
서울성모병원 장 교수팀은 최근 5년간 경피적 하대정맥 판막 치환술, 겨드랑이동맥 접근 TAVI, 바실리카 기법, 경대정맥 대동맥판막 치환술에 이어 이번 라마콘까지 5건의 한국 첫 시술 사례를 기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