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리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만든 할리우드 영화감독 롭 라이너(77)가 12월 1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부인 미셸과 함께 살해된 사건은 충격적이다. 수사 결과 라이너 부부는 약물 중독에 시달리던 아들 닉(32)에게 살해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인 존속살해 사건은 전 세계에 약물 중독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기 약물에 중독됐다 재활치료, 32세 아들

물론 보다 정확한 범죄 내용이나 약물과의 연관성은 수사가 끝나야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CNN을 비롯한 미국 언론들은 경찰과 라이너 감독과 아들의 사정을 잘 아는 주변 인사들을 인용해 이번 사건이 약물에 중독된 아들이 벌였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보도를 하고 있다. 아들 닉은 청소년기부터 마약중독으로 부모와 갈등을 빚어왔다. 가출과 노숙생활을 하다 부모의 사랑으로 어느 정도 중독재활을 거쳤으며, 아버지의 도움으로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거의 정상으로 돌아온 줄로 알았던 아들 닉이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이번 사건은 충격에 충격을 더하고 있다.
닉은 사건 전날 부모와 함께 유명 코미디언인 코난 오브라이언의 성탄절 파티에 참석했는데 중독 재활 중인 아들을 홀로 둘 수 없었던 부모가 그를 데려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파티장에서 닉은 사람들에게 이름과 성, 유명 인사 여부 등을 반복해서 묻는 이상 행동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아버지와 말다툼 끝에 일찍 귀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닉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약물중독, 충동조절 기능 마비시켜 폭력성·잔혹성 증폭
이를 계기로 약물 중독의 폐해, 그리고 범죄와의 관련성을 알아본다. 사실 약물 중독은 살인을 포함한 다양한 범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인간의 숨은 폭력성과 잔혹성이 드러나게 하거나 극대화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약물이 뇌의 충동조절 기능과 현실인식 능력을 마비시켜 공격성을 갑자기 높이는 것이 이유다. 이 때문에 발작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다른 사람을 살해하거나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자해를 할 수도 있다. 대다수 마약은 뇌의 보상회로와 전전두엽을 손상시켜 환각·환청·망상·발작 등 정신적 이상을 유발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발적인 살인으로 이어지기가 쉽다고 한다.
약물은 뇌의 기저핵, 확장된 편도체, 전전두엽 피질에 타격
이를 뇌과학적·신경의학적·심리학적으로 살펴보자. 이런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온 미국 국립약물남용연구원(NIDA)의 홈페이지와 논문·보고서가 이를 잘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약물은 뇌에서 크게 봐서 '기저핵', '확장된 편도체', '전전두엽 피질' 등 세 부분에 타격을 입힌다. 이를 통해 의존과 탐닉 증상이 심해지면서 헤어나기 쉽지 않은 중독자가 된다.
기저핵(Basal Ganglia)은 인간이 음식·사교활동·수면·성생활 등 생존과 관련한 건강한 행동에서 쾌감을 느끼는 부위다. 뇌가 쾌감을 보상으로 얻으면서 이를 반복하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보상회로(reward pathway)다. 기저핵은 보상회로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즐거운 행동으로 보상회로를 활성화할 때마다 도파민이 분비돼 이를 기억하도록 신호를 보낸다. 그 결과 해당 행동을 반복하게 만들고 습관 형성으로 이어진다.
생존 필수 보상회로를 과다 활성화해 의존·중독 유발
문제는 약물이 보상회로를 과도하게 활성화한다는 점이다. 반복적인 약물 노출은 이 회로가 약물 외에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힘들게 한다. 결국 의존과 탐닉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의미다.
확장된 편도체(Extended Amygdale)는 약물을 주입한 지 일정 시간이 흘러 효과가 사라진 뒤에 나타나는 금단증상인 불안·과민성·불편함 등 스트레스 감정에 관여한다. 그 결과 약물에 대한 재탐욕과 탐닉을 유발한다. 약물 사용자가 처음에는 약물로 인해 쾌감을 얻지만 시간이 지나고 중독·의존·탐닉 단계에 이르면 쾌감이 아닌, 금단증상에서 나타나는 불편함에서 일시 벗어나기 위해 반복적으로 약물을 찾게 된다. 약물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심각한 중독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충동조절 담당 전전두엽 피질, 늦게 성숙…청소년 중독 취약 이유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은 인간의 생각·계획·문제해결·의사결정과 함께 충동 조절을 담당하는 영역이다. 약물 중독으로 이 부분이 손상되거나 이 부분과 기저핵, 확장된 편도체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충동조절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 상태가 되면 강박적으로 약물을 찾게 된다. 특히 이 부분은 뇌에서 가장 늦게 성숙한다. 청소년기에 약물에 접한 사람들이 중독에 특히 취약한 이유다.
미국에서 연간 수만 명이 사망하면서 사회문제가 된 펜타닐 등 오피오이드 계열의 약물의 경우 이 세 부위 외에도 심장박동·호흡·수면 등 인간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기본 기능을 조절하는 뇌간 등 뇌의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준다. 과다 복용할 경우 호흡 억제 등으로 쉽게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이유다.
약물, 뇌를 훈련시켜 갈망 유도…끊어도 ‘반사’로 다시 갈망 느끼게
NIDA는 약물 중독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뇌의 ‘반사(reflex)’ 작용이라고 지적한다.약물 복용은 도파민 분비를 과도하게 촉진해 건강한 활동을 희생하면서까지 약물을 갈망하도록 뇌를 학습시킨다. 이렇게 학습된 뇌는 약물과 관련된 활동이나 환경 등을 함께 기억한다. 문제는 이런 주변 기억을 다시 접하게 되면 약물에 대한 통제할 수 없는 갈망을 일으킨다. 이를 반사라고 하는데, 재활치료 등으로 몇 년 간 약물을 끊어도 예전에 약물을 사용했던 지역이나 장소, 상황을 다시 접하면 갈망을 느낄 수 있다. ‘반사’는 약물이 인간의 뇌를 얼마나 지독하게 지배하고 중독의 수렁에 빠뜨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내에서도 약물중독 관련 잔혹 범죄
국내에도 마약중독자가 존비속 살인 등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적지 않다. 1989년 부산 사하구에선 필로폰에 중독된 30대 마약 유통업자가 환각 상태에서 벌인 끔찍한 범행은 지금도 회자된다. 이 중독자는 부인과 두 자식을 살해하고 이불에 덮어놓은 뒤 자신은 나체로 집에서 나와 연립주택 난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엽기적이고도 끔찍한 행동을 벌였다.
2014년 부산 해운대구에선 필로폰으로 환각 상태에 빠진 30대 남성이 내연녀의 안구를 적출하려고 시도하다 미수에 그치는 잔혹극을 벌였다.
약물 중독이 인간의 자제심을 떨어뜨려 폭력성을 부추기고 살인이나 살인미수 등 강력 범죄로 이어진 경우다. 인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하고 잔인한 행동을 벌이기도 한다.
영화계의 ‘창작 샘물’의 안타까운 별세

라이너는 다양한 장르를 할리우드에 유행시킨 ‘창작 샘물’ 영화감독이다. 로맨틱 코미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심리스릴러 ‘미저리’(1990), 법정 드라마 ‘어퓨굿맨’(1992), 버디 코미디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들’(2007) 등 작품 목록만 봐도 그의 창작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라이너를 몰라도 그의 작품 이름을 대면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은 훨씬 많다. 영화팬들에게 전율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준 작품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남녀간 친구 사이는 가능한가’ ‘오르가즘은 꾸밀 수 있는가’를 묻는 매그 라이언 주연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그중 하나다. 198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미저리’는 스토킹에 비교적 관대했던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심리적·육체적으로 끔찍한 범죄이자 학대, 인간성 말살시도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자부심 높은 미국 해병대에서 발생한 의문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법무장교를 묘사한 잭 니컬슨과 톰 크루즈 주연의 ‘어퓨굿맨’은 긴장감 넘치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도 군 의문사가 문제되던 시절이라 사회적인 소재로도 관심을 모았다. 해병대 대령으로 분한 잭 니컬슨이 법정 심문에서 군 법무장교인으로 나온 톰 크루즈에게 말한 “당신은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You can’t handle the truth!)”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로 꼽힌다.
약물 중독이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범죄로 이어진 것이 이번 사건의 본질일 것이다. 전국, 전 세대로 번져가는 약물 중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미국이라는 국가와 사회의 책임도 작지 않다. 영화팬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하던 이런 거장이 약물중독에 시달리는 아들에게 이토록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