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보건기구(WHO)가 2017년부터 전 세계에 보급해 온 ICOPE(Integrated Care for Older People, 고령자 통합 돌봄)가 정작 대표적인 고위험군인 ‘복합 만성질환 노인’에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ICOPE의 첫 단계인 선별(screening) 단계에서 거의 모두가 ‘문제 있음’으로 분류되는 현상이 확인된 것이다.
이번 연구는 싱가포르 국립헬스케어그룹(National Healthcare Group) 폴리클리닉 연구팀이 수행해 최근 국제학술지 ‘BMC Geriatrics’ 온라인판(11월 19일자)에 실렸다. 당뇨병과 고혈압, 이상지질혈증(고지혈증)을 동시에 가진 고령 환자가 많은 한국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경우 비슷한 문제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97.6%가 ‘문제 있음’…선별 기능이 없는 1단계
연구팀은 싱가포르 일차의료 현장에서 당뇨병, 고혈압, 이상지질혈증을 모두 가진 60~100세 노인 411명(평균 69.9세)을 대상으로 ICOPE 1단계 선별 검사를 시행했다. ICOPE 1단계는 청력, 시력, 이동성, 인지, 우울, 영양 등 6개 내재역량(intrinsic capacity, IC) 영역을 간단한 문진, 테스트로 체크해 하나라도 ‘손실’이 있으면 ‘신체적 인지적 내재역량 저하’로 판단한다.
결과는 극단적이었다. 6개 영역 중 하나 이상에서 IC 손실이 있는 사람이 97.6%에 달했던 것. 영역별로는 청각(83.9%), 이동성(52.8%), 시각(46.2%), 인지(31.6%) 순으로 문제가 많았다. 표면적으로 보면 거의 모두가 ‘기능 저하’ 상태다.

하지만 같은 대상자에게 ‘수정형 노쇠 페노타입’(mFP)과 ‘임상 노쇠 척도(Clinical Frailty Scale)라는 두 가지 정교한 노쇠 검사 도구를 적용하자, 노쇠 비율은 7.5~11.9% 수준에 그쳤다. 즉, 실제로는 10명 중 1명꼴이 ‘진짜 노쇠’인데, ICOPE 1단계만 보면 거의 모두가 “문제 있음”으로 묶여버리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연구팀은 “다중 만성질환 노인에서 ICOPE 내재역량 점수만으로 노쇠 여부를 선별하는 것은 민감도(약 60%)는 부족한 반면, 진짜로 오인할 위양성률(22~24%)은 높아 실제 임상에서 쓰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선별 단계가 ‘필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노인에게 적용하면…‘선별했지만, 선별이 안 되는’ 상황
이런 문제는 초(超)사회에 막 진입한 한국에서 더 심각해질 수 있다. 2023년 노인실태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노인은 86.1%가 평균 2.2개의 만성질환을 갖고 있다. 그중 3개 이상도 35.9%에 이른다. 당뇨에 고혈압, 여기에 이상지질혈증까지 ‘3중고’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이렇게 많은 것이다.
이런 집단에 ICOPE 1단계를 그대로 적용하면, 싱가포르 연구처럼 대부분이 ‘문제 있음’ 판정을 받으면서 죄다 2단계(다영역 평가) 대상이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한국에 노인의학 전문 인력부터 보건소와 1차의료기관의 시간과 예산, 이를 뒷받침할 건강보험 수가, IT 인프라에까지 충분한 기반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별을 해도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현장이 마비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ICOPE 자체는 좋은 모델… “순서를 바꾸자”는 제안
WHO ICOPE는 원래 ‘질병’ 중심이 아닌 ‘기능’ 중심의 노인 통합 관리를 목표로 하는 5단계 모델이다. 1단계 선별(screening) → 2단계 다영역 평가 → 3단계 개인별 관리 계획 → 4단계 서비스 연계·조정 → 5단계 정기 모니터링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우리나라도 보건복지부나 한국보건의료연구원 등이 WHO ICOPE 가이드라인을 번역·소개하며, 한국형 노인 통합 돌봄의 참고 틀로 삼고 있다. 다만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재활·영양팀이 한 팀으로 움직이고, 선별부터 모니터링까지 하나의 경로에서 관리하는 ‘완전한 5단계 ICOPE’를 실제로 돌리는 기관은 매우 드물다.
싱가포르 연구팀은 이번 논문에서 새로운 제안을 하나 했다. “순서를 바꾸자”는 것이다. ICOPE 선별(1단계) → 양성인 경우 2~5단계로 기계적으로 가는 대신, 먼저 정교한 노쇠 검사로 노쇠(frail)와 전노쇠(pre-frail) 고위험군을 추려낸 뒤, 이들에게 ICOPE 2~5단계(다영역 평가~모니터링)를 집중 제공하자는 해법이다.
자원이 한정된 한국에서도 같은 고민이 필요하다. WHO가 제시한 ICOPE 방향성은 옳지만, 한국식의 초고령, 다중이환 현실에 맞게 ‘입구(선별)’부터 재설계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