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가 망가졌는데 소리는 잘 나온다면...

[이성주의 건강편지]

2024년 10월 21일ㆍ1642번째 편지


사진 속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재즈 애호가들은 잘 알겠지만, 1917년 오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체로에서 태어난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이지요.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와 함께 즉흥 연주가 생명인 ‘비밥’의 대중화를 이끈, 모던 재즈의 선구자입니다. 디지는 본명이 존 벅스 길레스피인데, 어렸을 때 밴드 생활을 하며 익살스러운 ‘4차원 행동’으로 주위 사람을 ‘경악’케 해서 ‘디지(Dizzy 어지러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오른쪽 사진에는 그의 두 트레이드 마크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트럼펫을 불 때 볼이 황소개구리의 볼만큼 커지는 겁니다. 디지의 볼을 연구하던 한 과학자는 ‘길레스피 주머니’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디지의 선천적 해부학적 특징에다 끊임없는 연습 때문에 볼 근육이 서서히 강화되며 바뀐 것으로 추정합니다.

또 하나는 독특하게 생긴 트럼펫입니다. 트럼펫에서 소리가 나오는 ‘벨’ 부위가 위로 45도 치솟아 있지요? 이것은 황당한 사고(事故)와 열린 사고(思考)의 결합물이었습니다.

1953년 1월 6일, 디지는 뉴욕의 재즈 클럽에서 아내의 생일 파티를 열고, 라디오 방송 출연을 위해 자리를 비었다가 되돌아와선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공연 무대의 스탠드에 뒀던 ‘보물’ 트럼펫이 망가져 있었던 것입니다. 주위 사람은 한 코미디언이 무대에서 넘어져 스탠드를 쳤다고 전했습니다.

디지는 그날 황당함과 분노를 삭이고 ‘사고난 트럼펫’으로 연주한 뒤, 다음날 악기상을 통해 트럼펫을 펴서 고쳤습니다. 그런데 망가진 트럼펫의 매력적 소리가 계속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디지는 아내에게 스케치를 그려달라고 해서 마틴 사에 ‘굽은 트럼펫’을 주문했고, ‘디지 벨’은 그의 상징이 됐습니다. 이후 킹 뮤지컬 인스트루먼트, 레놀드 쉴케 등에서도 디지 벨을 만들었지요.

1995년 크리스티 경매에 마틴이 만든 길레스피의 트럼펫이 나왔는데, 맨하탄의 건축가 제프리 브라운에게 6만 3000달러(약 8630만원)에 낙찰됐고, 수익금은 2년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디지처럼 암에 걸린 재즈 연주자들에게 기부됐다고 합니다. 또 다른 ‘디지 벨’들도 고가에 거래되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디지 벨로 연주한 천상의 재즈곡이지요.

미국 클라이슬러 창업자인 윌터 크라이슬러는 “기회가 앞문에서 노크하고 있을 때 네잎클로버를 찾으려고 뒤뜰에 나가 있지 말라”고 했지요? 가슴 저린 실패나 황당한 사고도 눈이 빛나고, 가슴이 열려 있는 사람에겐 기회가 된다는 것을 디지의 음악 인생이 증명하고 있지 않나요? 여러분은 혹시 지금 하늘이 준 기회를 몰라보고 놓치고 있지 않나요? 지금, 둘러볼까요? 여러분의 잠재력과 꿈을 믿으며···.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디지 길레스피의 연주로 지금 날씨에 어울리는 연주곡 준비했습니다. 이브 몽탕의 음성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만추를 느낄 수 있는 ‘고엽’입니다.

디지 길레스피 '고엽' 듣기 ▷

 

    이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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