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다른 증상 없이 지내다가 주로 성인이 된 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거나 움직임을 조절하기 어려워지고, 기억력과 판단력이 떨어지며 성격과 행동에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인지 기능이 함께 떨어져 혼자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헌팅턴병은 이처럼 서서히 진행하는 유전성 뇌질환이다.
대물림 가능성도 높다. 부모 한 명이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변이를 갖고 있으면 자녀가 이를 물려받을 확률은 각각 50%다. 하지만 현재까지 헌팅턴병 자체의 진행을 늦추도록 승인된 치료제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질병 진행 속도를 3년간 75% 늦췄다는 유전자치료제가 미국 허가 문턱에 섰다.
유전자치료제 개발사 유니큐어(uniQure)는 헌팅턴병 치료 후보 AMT-130(성분명 이페준티르진 이닐파르보벡)의 생물의약품 허가신청서(BLA)를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제출했다고 2일 밝혔다. 회사는 가속승인을 신청하면서 우선심사도 요청했다.
부모가 변이 가지면 자녀에게 50% 확률로 유전
헌팅턴병은 뇌 신경세포가 서서히 손상되는 희귀 유전질환이다.
병명은 1872년 이 질환의 유전성과 증상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미국 의사 조지 헌팅턴(George Huntington)의 이름에서 따왔다. 과거에는 몸이 춤추듯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증상 때문에 ‘헌팅턴 무도병’으로 불렸다. 이후 인지기능 저하와 정신·행동 변화까지 나타나는 질환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헌팅턴병’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됐다.
헌팅턴병은 HTT 유전자의 이상으로 발생한다. 이 유전자에는 DNA 염기서열인 C·A·G가 반복되는 구간이 있다. 헌팅턴병 환자는 이 반복 횟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면서 비정상적인 헌팅틴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이로 인해 시간이 흐를수록 뇌 신경세포의 기능이 떨어진다.
헌팅턴병은 대물림 가능성도 크다. 부모 가운데 한 명이 질병을 일으키는 HTT 유전자 변이를 갖고 있다면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고 자녀마다 변이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50%다. 첫째가 변이를 물려받았다고 해서 둘째의 확률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자녀 한 명 한 명에게 50%의 확률이 개별적으로 적용된다.
대표적인 증상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팔·다리나 얼굴이 움직이는 ‘무도증’이다. 기억력과 판단력 같은 인지기능도 떨어질 수 있다. 우울감이나 충동성 등 정신·행동 변화가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병이 진행하면 운동능력과 인지기능은 물론 일상생활을 혼자 해내는 능력까지 점차 떨어진다.
한국에서는 더욱 드물다. 국민건강보험 자료로 2010~2019년을 분석한 연구에서 10년간 1521명의 신규 환자가 확인돼 한 해 평균 약 152명꼴이었다. 연간 발생률은 인구 10만명당 0.29명이었고, 연구진이 누적 환자와 예상 사망률을 반영해 추정한 10년 유병률은 10만명당 약 2.2명이었다.
유전자 고치지 않고 헌팅틴 단백질 생산 억제
AMT-130은 흔히 알려진 ‘유전자 가위’처럼 잘못된 DNA를 잘라내거나 고치는 치료제는 아니다.
아데노연관바이러스 5형(AAV5)을 운반체로 이용해 인공 마이크로RNA(miRNA)를 뇌세포에 전달한다. 이 마이크로RNA가 HTT 유전자의 정보가 단백질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억제해 헌팅틴 단백질 생산을 줄인다.
잘못된 유전자를 없애는 대신, 해당 유전자가 단백질을 계속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작동을 낮추는 방식이다.
투여 방법도 일반적인 주사와 다르다.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위치를 확인하면서 뇌의 선조체 가운데 꼬리핵과 조가비핵에 치료제를 직접 넣는다. 투여는 한 번이며, 이후 수년에 걸쳐 효과와 안전성을 추적한다.

고용량 12명, 3년 뒤 병 진행 75% 느려
FDA 신청의 핵심 근거는 미국과 유럽에서 진행한 1·2상 임상시험의 3년 추적 결과다.
유니큐어는 AMT-130을 투여받은 환자 29명의 경과를 분석했다. 고용량군 17명, 저용량군 12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각 용량군에서 12명이 36개월 추적 시점에 도달했다.
연구진은 치료받은 환자들의 경과를 국제 헌팅턴병 환자 관찰자료인 ‘Enroll-HD’와 비교했다. Enroll-HD는 치료 효과를 시험하기 위한 임상이 아니라, 여러 나라 헌팅턴병 환자들의 증상과 기능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장기간 기록해온 데이터베이스다.
연구진은 이 자료에서 나이와 질환 상태 등이 비슷한 환자들을 골라 외부 대조군으로 삼았다. 고용량군 12명과 비교한 외부 대조군은 940명이었다.
고용량 AMT-130을 투여한 12명은 3년 뒤 외부 대조군보다 질병 진행 속도가 75% 느렸다.
연구진은 운동능력과 인지기능, 일상생활 수행능력 등을 종합해 헌팅턴병의 진행 정도를 평가하는 종합 헌팅턴병 평가척도(cUHDRS)를 사용했다. 이 척도는 점수가 떨어질수록 기능이 나빠졌다는 의미를 갖는다.
3년간 치료군의 점수는 평균 0.38점 떨어진 반면 외부 대조군은 1.52점 떨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계산한 질병 진행 속도가 치료군에서 75% 느렸다.
일상생활 기능만 따로 평가해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혼자 일상생활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TFC(총기능수행능력) 점수는 치료군에서 0.36점, 외부 대조군에서 0.88점 떨어졌다. 이에 따라 기능 저하 속도는 치료군이 60% 느린 것으로 분석됐다.
다만 ‘75%’라는 수치는 환자의 증상이나 뇌기능이 75% 좋아졌다는 뜻은 아니다. 치료받지 않은 비슷한 환자들과 비교했을 때 3년 동안 운동·인지·일상생활 기능이 나빠지는 속도가 그만큼 느렸다는 의미다.
연구 규모도 함께 봐야 한다. 75%라는 수치는 고용량 치료를 받고 3년까지 추적된 환자 12명에게서 나왔다.
비교 대상도 같은 시기에 모집한 환자가 아니라 기존 자연경과 자료에서 통계적으로 비슷한 환자를 골라 구성했다. 실제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또 얼마나 오래 이어지는지는 더 많은 환자를 대상으로 확인해야 한다.
안전성도 계속 살펴봐야 한다. 유니큐어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임상 전체에서 치료제와 관련된 중대한 이상반응이 5건 보고됐다. 가장 흔하게 보고된 이상반응은 치료제를 뇌에 직접 넣는 시술과 관련돼 있었다.
한때 추가시험 요구한 FDA⋯다시 신청 길 열려
AMT-130의 신청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FDA는 한동안 기존 1·2상 자료와 외부 대조군 비교만으로 효과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해 말에는 현재 자료만으로 허가신청을 뒷받침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회사에 전달했다.
올해 3월에는 무작위·이중맹검 방식의 추가시험을 권고했다. 실제 치료제를 넣지 않는 ‘가짜 수술’ 대조군을 두는 방안까지 거론됐다.
그런데 지난 6월 FDA와 유니큐어가 다시 협의하면서 허가 신청의 길이 열렸다. 이후 전달된 공식 회의록에서 FDA는 현재 확보된 3년 자료를 근거로 가속승인 신청서를 제출하는 방안을 받아들였다.
승인 이후 효과를 다시 검증하는 임상시험은 별도로 진행해야 한다. 이 시험에서는 가짜 수술군 대신 기존 표준치료를 받는 환자를 비교군으로 두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유니큐어는 지난 2일 FDA에 AMT-130의 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영국 의약품·보건의료제품규제청(MHRA)에도 판매허가신청서를 냈다.
FDA는 앞으로 AMT-130의 3년 효과가 헌팅턴병의 진행을 실제로 늦췄다고 볼 만큼 충분한지, 안전성까지 고려했을 때 치료 이득이 분명한지를 심사하게 된다. 특히 고용량군 12명과 외부 대조군을 비교한 결과라는 점은 허가 판단에서 중요한 검토 대상이다.
유니큐어가 요청한 우선심사가 받아들여지면 FDA의 심사 목표 기간은 일반적인 10개월에서 6개월로 짧아진다.
헌팅턴병은 지금까지 증상을 줄이는 치료는 가능했지만 병이 나빠지는 속도 자체를 늦추도록 승인된 치료제는 없었다. AMT-130이 허가를 받는다면 부모에게서 자녀로 이어질 수 있는 이 희귀 뇌질환에서 처음으로 질병 진행 자체를 늦추는 치료 선택지가 생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