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안 어르신이 갑자기 정신이 없고 헛소리를 하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85세 벨기에 여성은 정신이 맑았다가도 순간 오락가락하고, 헛것을 보고 듣고 헛소리를 하는 증상(섬망)을 3주 동안 보였다. 배가 아프거나 열이 나는 등 감염을 의심할 만한 다른 증상은 전혀 없었다.
벨기에 브뤼셀 에디스 카벨 지역간 종합병원 응급실에 옮겨진 이 환자는 신경과적 검사에서도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 환자 증상의 원인을 찾기 위해 흉복부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를 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배 속 깊은 곳에 있는 장기인 비장(지라)에서 가스와 고름이 가득 찬 대형 농양(고름집)이 발견됐다.
연구팀은 이 환자에게 본태성 혈소판증가증, 즉 혈액 속 혈소판이 너무 많이 만들어지는 혈액병이 있었고, 이로 인해 피떡(혈전)이 비장 동맥을 막아 조직이 썩으면서 대장균에 감염돼 농양이 생겼다는 것을 밝혀냈다. 환자는 곧이어 패혈성 쇼크와 많은 기관이 기능을 잃는 증상을 일으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연구팀은 노인에게 무리한 장기 절제술 대신, 관을 피부로 넣어 고름을 빼내는 시술(경피적 배액술)과 집중적인 항생제·항응고제 치료를 했다. 환자는 비장을 무사히 보존한 채 완치돼 건강하게 퇴원했다.
이 사례 연구 결과(Atypical Presentation of a Splenic Abscess Secondary to Splenic Artery Thrombosis With Isolated Confusion: A Case Report)는 최근 국제 학술지 《큐레우스(Cureus)》에 실렸다.
비장(지라)은 왼쪽 위 배에 있는 장기로, 피를 걸러내 혈액을 정화하는 기능을 한다. 비장에 염증이 생겨 고름이 차오르는 병을 비장 농양이라고 한다.
국내외 의학 문헌 및 부검 데이터를 보면 비장 농양의 빈도는 전체 입원 환자 중 0.05~0.7% 수준으로 매우 드물게 보고된다. 하지만 매우 위험한 병이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보통 당뇨병, 중증 폐렴, 심내막염, 췌장염, 면역저하 상태 등 기저질환(지병)을 앓는 환자에게 2차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비장 농양 환자는 고열과 함께 왼쪽 상복부에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환자는 면역 반응이 뚝 떨어져 있어 열이 나지 않거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비정형적인 증상을 자주 나타낸다. 전신 염증 반응으로 뇌 기능에 영향을 미쳐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나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헛것을 보고 듣고 헛소리를 하는 증상(섬망)만 일으키는 사례도 많다.
이번 사례처럼 혈액 속 혈소판이 지나치게 많이 증식하는 본태성 혈소판증가증(국내 유병률 인구 10만 명당 약 2~3명)이 원인으로 작용해 혈전(피떡)이 생기고, 이로 인해 장기 조직이 썩는 허혈성 괴사로 이어지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과거에는 비장 농양이 발견되면 이 장기를 모두 잘라내는 수술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초음파나 CT 영상으로 관을 삽입해 고름을 빼내는 치료법이 발달해 장기를 보존하면서도 높은 치료 성공률을 거두고 있다.
섬망은 뇌 세포가 정상적으로 일할 수 없을 정도로 신체에 갑작스러운 충격이나 급성 불균형이 찾아왔을 때 발생하는 뇌의 비상경보에 해당한다. 정신 혼동(착란)이 심해지거나 급격히 악화하면 섬망을 일으킬 수 있다. 몸속에 발생한 심한 감염·염증, 신체적 스트레스와 급성 질환, 약물 복용 및 독성 반응, 체내 대사 불균형 및 산소 부족 등이 섬망의 주요 원인이다.
요로감염, 폐렴, 배 속 감염(비장 농양, 복막염 등), 패혈증처럼 온몸에 염증 물질이 돌면 뇌 기능이 급격히 떨어진다. 큰 수술을 받은 뒤에나 중환자실 입원, 탈수, 뇌졸중, 골절, 심한 통증 등 신체적 스트레스가 매우 심할 때도 섬망이 발생한다. 진통제, 수면제, 감기약, 신경과 약물의 부작용이나 기존에 복용하던 약물을 갑자기 끊었을 때 금단 증상으로 뇌 대사에 혼란이 올 수 있다. 고혈당·저혈당, 간·콩팥 기능의 마비로 노폐물이 쌓였거나 호흡기병으로 산소가 부족할 때도 뇌세포 활동이 둔화하면서 섬망이 일어날 수 있다.
어르신에게 평소와 달리 갑작스러운 의식 저하나 정신 혼동, 헛것을 보고 듣는 증상이 나타나면 단순한 노환으로만 여겨선 안 된다. 배 속이나 전신의 숨겨진 감염·염증병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밀 검사를 일찍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주 묻는 질문]
Q1. 어르신이 열도 없고 배도 안 아파하시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헛것을 보고 듣거나 헛소리를 하시면 감염일 수 있나요?
A1. 네, 그렇습니다. 어르신들은 면역계의 반응이 느리거나 약해 심각한 내장 감염이나 염증에도 열이 나지 않거나 통증을 잘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대신 뇌로 가는 산소와 영양 공급 불균형, 염증 물질의 영향으로 갑자기 정신이 오락가락하거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것을 보고 듣고 헛소리를 하는 섬망 증상이 유일한 신호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의식 변화가 있다면 즉시 병원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Q2. 비장에 고름이 많이 차오르면 비장을 떼어내는 수술을 해야 하나요?
A2. 과거에는 비장 절제술이 주요 치료법이었으나, 최근에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수술 없이 치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부를 통해 미세한 관을 넣어 고름만 밖으로 빼내는 시술(경피적 배액술)과 항생제 투여를 병행하면 비장을 그대로 둔 채 안전하게 치료할 수 있습니다.
Q3. 피떡이 어떻게 배 속의 장기에 고름을 만들 수 있나요?
A3. 피떡이 비장으로 들어가는 혈관(비장 동맥)을 막으면,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비장 조직 일부가 썩게 됩니다. 이렇게 손상되고 부패한 조직은 세균이 번식하기 매우 좋은 환경이 됩니다. 핏속 대장균 등 세균의 침투로 대형 고름집(농양)이 생길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