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7월 11일 (토)

“외과는 다들 말린다는데”… 아들에게 메스를 쥐여준 ‘외과 의사의 진심’

3代에 걸쳐 외과의사 5명…한 집안이 지켜온 '필수의료의 원칙'

외과의사가 귀해졌다. 밤을 새우고, 응급에 불려 나가고, 잘못되면 소송까지 감당해야 하는 외과에서 젊은 의사들이 빠져나간 지 오래다. 필수의료가, 응급의료가 무너진다는 얘긴 이제 뉴스도 아니다. 우리 일상이다.

그런데 부산 서면의 한 외과의원에는 시대를 거스르는 풍경이 있다. 아버지 주종수 대표원장과 두 아들 주현호, 주인호 원장이 같은 수술실을 쓴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메스를 잡는 ‘삼부자 외과'다.

“외과는 다들 말린다는데”… 아들에게 메스를 쥐여준 ‘외과 의사의 진심’
왼쪽부터 차남 주인호 원장, 주종수 대표원장(전 인제대 부산백병원 외과 교수), 장남 주현호 원장. 사진=코메디닷컴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번 더 놀란다. 경성의전을 나온 할아버지 주영재(朱永在. 1917~2008)와 서울대 의대를 나온 작은 할아버지 주흥재(朱興在,1935~2022) 형제까지, 한 집안 3대에서 외과의사가 다섯 명이나 나온 것.

자칫 ‘의사 가문’ 자랑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숨은 맥락은 한때 외과의사라는 직업이 지녔던 자부심의 크기다. 자기 자식에게 기꺼이 권하고, 자식도 그게 멋진 의사의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시대도 있었다는 증거. 역설적으로 오늘과는 무척 달랐던, 한때 우리나라 한국의 외과 의사 지형도다.

외과가 자랑스러웠던 시절

또 하나 특이한 것이 있다. 이들 3대(代)가 모두 인제대와 백병원, 그리고 백인제-백낙환으로 이어지는 백씨 집안과 인연이 계속 겹친다는 것.

그 뿌리는 의사 주영재다. 1939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백인제 박사가 세운 (서울)백병원에 외과의사로 합류했다. 거기서 간호사로 일하던 송정자씨와 결혼도 했다. 초대 부원장도 맡았다.

백병원 설립 초기의 외래진찰소 주역들. 앞줄 왼쪽 검은색 양복차림이 백인제 원장. 맨 뒷줄 왼쪽이 주영재 부원장. 가운뎃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주영재와 결혼한 송정자 간호사.

이후 결핵을 앓으면서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아내의 손을 잡고 고향인 강원도 고성으로 내려가 요양했다. 그 경험은 1952년 경남 마산 국립결핵요양소 의사로 내려가게 했고, 훗날 요양소장까지 맡게 되는 계기가 됐다. 환자였던 사람이 결핵 치료의 최전선에 서게 된 것.

이후 마산과 부산에서 개원도 했다. 그러다 1964년 특별한 공동개원 모델(‘부산제일병원’)을 시작했다. 여러 의사가 한 곳에 모여 종합병원형 협진 모델을 꿈꾸던, 당시로선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하지만 너무 앞섰던 것일까? 그 실험은 10년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료제도 발전과 혁신을 꿈꾸었던 주영재의 그 뜻에 공감한 당시 서울백병원장 백낙환은 그와 함께 의료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처음 인연을 맺었던 백인제 박사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고 없었지만, 그의 조카 백낙환과 다시 손잡은 셈이다.

그런 덕분에 『의료란 무엇인가』 『의료혁신론』 같은 책들도 썼다. 그가 남긴 여러 저서 가운데 『단골의사 중심의 의료제도』는 특히 눈길을 끈다. 환자가 평생 믿고 찾을 수 있는 의사가 의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지금의 ‘주치의’ 개념과 닿는다. 이 생각은 훗날 아들과 손자들 진료실에서 현실이 된다.

삼촌의 신장이식 술기가 조카 통해 부산백병원에 뿌리내

아버지의 인연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가톨릭대 의대를 나와 성모병원(옛 명동 성모병원)에서 수련한 주종수(朱鍾秀·79)가 1980년 부산백병원 외과에 합류한 것.

그는 여기서 '소아외과'를 서울대병원 소아외과 김우기 교수 도움을 받아 열었다. 어린이부터 갓난아기까지, 작고 약한 몸을 다루는 고난도 분야다.

독일 뮌헨대 소아병원에 객원교수로 다녀오며 실력도 더 다졌다. "1㎝만 어긋나도 (환부를) 제대로 못 찾는다"는 영역. 숱한 경험이 손에 쌓여야만 되는 일이다.

그러던 당시, 부산백병원에 신장이식팀이 없었다. 서울은 물론 부산의 일부 대학병원들에서도 이미 하고 있던 수술. 누군가는 시작해야 했고, 그때 백병원 의료원장 백낙환은 대한민국 신장이식의 선구자 이용각 교수의 제자인 주종수에게 신장이식을 맡겼다.

문제는 어디서 배워올 것이냐는 것. 모교인 가톨릭대로 갈까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작은아버지 주흥재를 찾아갔다. 경희대병원 외과 교수로 경희대병원장과 의료원장까지 지낸 전문가였다.

삼촌은 조카에게 직접 손기술을 전수했다. 그리고 조카는 경희대에서 함께 내려온 신장내과 전문의와 팀을 꾸렸다. 마취과, 병원 행정파트도 적극 협조했다. 그렇게 부산백병원에도 신장이식 시대가 열렸다.

원칙도, 품위도 지키려는 시험대…‘당일수술’ 전문화 모델

그리고 1997년, 그는 부산백병원을 나와 부산 서면에 의원을 차렸다. 탈장과 치질 ‘당일 수술’(Day Surgery)을 위주로 한 병원.

1992년부터 대학병원에서 이미 손이 익도록 해왔던 일을 특화한 것이다. 수술비는 포괄수가(DRG) 정찰제. 입원해서 퇴원할 때까지 질병별로 미리 정해진 진료비만 지불(초음파검사비, 상급병실사용료는 별도)하면 된다. 부풀릴 것도, 깎을 것도 없다.

그는 "이렇게 하면 환자도 깨끗하고, 의사도 깨끗하다"고 했다.서울 남산골 옛 선비, 이른바 '딸깍발이'의 지조를 떠올리게 한다.

인제대를 나와 부산백병원에서 수련한 두 아들도 차례로 불러들였다. 큰아들 주현호(48) 원장은 대한탈장학회 및 대한대장항문학회, 그리고 부산외과학회 학술대회에서 수차례 탈장 관련 술기를 발표했고, 현재도 대한탈장학회와 부산외과학회 이사로 학회 대소사를 챙긴다.

작은아들 주인호(47) 원장은 아버지의 다양한 술기를 이어받았다. 전신마취를 하지 않고 수면마취와 국소마취로 하는 소아탈장 수술을 비롯해 음낭수종, 잠복고환 등에도 크고 작은 실적을 쌓아왔다.

이들 삼부자는 정찰제와 당일수술 방식을 공동의 원칙으로 삼았다. 2000년부터 2025년까지 25년간 소아탈장수술 8663례, 성인탈장수술 2607례, 항문수술 8028례를 이런 식으로 해냈다.

환자가 할머니 되어 손주 손을 잡고 온다

대학병원 교수 시절까지 45년 넘게 이렇게 진료하다 보니, 이 집안엔 또 하나의 역사가 쌓였다. 주종수 원장이 백병원 교수로 있을 때 수술받았던 환자가 이제 백발의 할머니·할아버지가 되어, 손주의 손을 잡고 탈장이나 치질 수술을 받으러 온다.

젋은, 아들 의사가 둘이나 있는데도 굳이 아버지를 찾는 이들도 있다. "나를 보고 온 환자가 아직 있구나 싶어 (수술칼을) 잡는다"고 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 신뢰가, 환자의 대(代)와 나란히 겹쳐 흐른다.

주종수가 부산백병원 시절 남긴 이력엔 결합쌍생아(샴쌍둥이) 분리수술처럼 세간의 이목을 끈 장면도 있다. 하지만 이들 삼부자를 지탱해 온 힘은 그런 화제가 아니다. 환자만 바라보며 보낸, 꼿꼿했던 그 정신이 오늘도 서면의 작은 수술실에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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