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님이 암 진단을 받은 뒤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잔다는 사람들이 있다. '앞으로 얼마나 들까,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다. 암 환자 가족이 겪는 이런 심리적 재정 스트레스가 실제 지출보다 보호자 건강을 훨씬 심각하게 망가뜨린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치료비 걱정이 치료비보다 더 무섭다?
국민건강보험이 암 치료비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지만, 급여 대상이 아닌 신약 항암제는 전액 본인이 부담한다. 사적 간병비 역시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치료가 길어질수록 지출은 늘고, 만약 일까지 쉬어야 하면 수입마저 끊긴다.
의학계에서는 이처럼 암 치료 과정에서 환자와 가족이 겪는 경제적 타격을 '재정독성(financial toxicity)'이라고 부른다. 항암제 부작용처럼 치료 자체가 가족의 재정 건강을 해친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실제 지출뿐 아니라 '돈이 모자랄 것 같다'는 심리적 압박 자체도 재정독성의 중요한 요소로 주목받고 있다.

얼마 나갔는지보다 '혹시'가 더 컸다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조비룡·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 유신혜 교수팀은 가톨릭대 심진아 교수와 함께 진행성 암 환자 가족 보호자 200명을 분석한 결과를 29일 발표했다.
연구팀은 경제적 부담을 두 가지로 나눠 측정했다. 실제 의료비·생활비 납부의 어려움인 '물질적 부담'과 재정 걱정·통제감 상실 같은 '심리적 스트레스'다.
심리적 스트레스가 높은 보호자는 그렇지 않은 보호자보다 삶의 질 저하 위험이 8.35배, 불안 위험이 7.44배, 주관적 건강 악화 위험이 3.77배, 우울 위험이 2.81배 높았다. 반면 실제 지출인 물질적 부담은 우울 위험만 2.67배 높이는 데 그쳤다. 돈이 실제로 나가는 것보다 '혹시 못 감당하면 어쩌나'라는 불안이 보호자를 더 빠르게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 만남 월 2회 미만이면 더 위험
돌봄으로 인한 사회적 고립도 보호자 건강을 독립적으로 위협하는 요인으로 나타났다.
친구와 교류가 적은(월 2회 미만) 보호자는 삶의 질 저하 위험이 2.36배 높았다.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보호자는 우울 위험 3.77배, 주관적 건강 악화 위험 3.32배, 불안 위험 2.49배로 올라갔다. 반대로 사회적 연결을 유지한 보호자일수록 재정 불안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작았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심리적 충격을 완충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만의 이야기 아냐
비슷한 흐름은 해외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MD앤더슨 암센터 그레이스 스미스 교수팀이 올해 2월 《미국의사협회 네트워크 오픈(JAMA Network Open)》에 발표한 연구에서, 암 환자 519명 중 절반 가까이가 재정독성을 경험했다. 이 재정 부담은 희망과 사회적 지지감을 약화시켜 삶의 만족도까지 낮추는 것으로 확인됐다. 사회적 연결이 재정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결론도 이번 서울대 연구와 같았다.
싱가포르 듀크-NUS 의대 연구팀이 2023년 《Cancer Medicine》에 게재한 연구도 있다. 진행성 암 환자와 보호자 299쌍을 33개월 추적한 결과, 보호자의 53%가 불안이나 우울 임계치에 도달했다.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보호자일수록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우울이 심해지는 흐름으로 빠질 우려가 높았다.
"경제 지원만으론 부족"
가톨릭대 심진아 교수는 "암 환자 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단순한 의료비 지출이 아닌 심리적 스트레스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이번 연구가 환자를 넘어 가족까지 고려하는 통합적 암 치료와 지원 정책의 근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조비룡·유신혜 교수는 “중증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은 자신의 일상과 사회적 관계를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다”며 “보호자의 삶의 질을 지키려면 경제적 지원에 더해, 사회적 연결과 지지를 잃지 않도록 돕는 구체적인 지원 체계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는 단일 기관의 횡단 연구로 인과관계 확정에는 한계가 있으며 종단 연구가 필요하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국제학술지 《미국종합암네트워크저널(JNCCN)》에 최근 게재됐다.
암과 싸우는 환자 곁에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는 가족이 있다. 이들의 '돈 걱정'은 건강 위협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높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