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7월 07일 (화)

비 내리는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드리운 ‘K-의료’의 따뜻한 손

그린닥터스, 러시아에서 종교간 장벽도 넘고 9년 전 암 환자도 다시 품었다

비 내리는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드리운 ‘K-의료’의 따뜻한 손
9년 전, 부산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았던 고려인 3세(문 류드밀라)의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아파트를 찾아간 그린닥터스. 마침 자원봉사자로 함께 길을 나섰던 스님, 목사님, 신부님도 여기 동행해 그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사진=그린닥터스

6월의 연해주 크라스키노엔 이른 아침부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 으스스한 한기가 몸을 휘감는다. 하지만 여기 하산종합병원 산하 크라스키노 임시 진료소 안은 국경과 종교를 초월한 온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음은 그린닥터스 의료봉사단에 합류해 러시아 현지를 찾은 임종수 그린닥터스 공보이사(온병원 행정원장)의 글을 옮겨 싣는다. <편집자 주>

참고="9년 전 암수술 받았던 고려인3세 찾아 러시아 왕진"(코메디닷컴 2026년 6월 5일자). https://kormedi.com/2822107/

한국의 보건의료 NGO ‘그린닥터스’와 부산 ‘온병원그룹’이 의료봉사를 위해 지난주말 여기를 찾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생긴 긴 공백을 깨고 다시 찾아간 것.

이들에 진료실을 흔쾌히 내어준 이는 예브게니 하산중앙병원장이었다. 평소 그린닥터스 정근 이사장과 친형제처럼 지내온 그의 배려와 초청으로 성사된 이번 봉사에서, 온병원그룹은 하산중앙병원과 의료교류 협약을 맺고 향후 크라스키노 현지 병원 설립 및 운영을 위한 든든한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처방전 확인, 또 확인”...신부·스님·목사님의 어설픈(?) ‘약국 보조’

7일과 8일, 임시 진료소에서 가장 이색적이면서도 감동적인 풍경은 ‘약국’에서 펼쳐졌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성직자들로 구성된 국제종교연합 회장단이 환자들을 위한 약 조제 봉사에 나선 것.

조계사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정여 스님은 기독교 임영문 목사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조심스레 약을 조제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툴 법도 했지만, 정여 스님은 눈을 떼지 않고 조제 방식에 귀를 기울였다.

약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종교인들이 임영문 목사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여기엔 부산 범어사 정여 방장스님과 정오 주지스님, 그리고 천주교 신요안 신부님이 함께 봉사에 나섰다. 사진=그린닥터스

옆에서는 지난해 인도 아삼 의료봉사에서 행정총괄을 맡았던 범어사 주지 정오 스님이 투약봉지에 주의사항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러시아 환자들이 혹여나 약을 잘못 먹어 사고가 날까 봐, 의사의 처방전을 두 번, 세 번 읽어 내려가는 스님들 눈빛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이들의 든든한 멘토는 임영문 목사(부산 전포동 평화교회)였다. 학창 시절엔 약사인 형님의 일을 돕고, 결혼 후엔 약사인 아내의 보조로 다년간 내공(?)을 쌓아온 임 목사는 약사 못지않은 '해박한' 지식으로 정여·정오 스님과 안락성당 신요안 신부의 손발이 되어주었다.

지난해 인도 봉사에서 투약 보조를 했던 신요안 신부(부산 안락성당)는 스님과 목사님이 정성껏 만든 약 봉지를 최종 검수(?)한 뒤, 환자의 손에 약을 꼭 쥐어주며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종교의 벽은 환자를 향한 자비와 사랑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부부가 함께, 동료가 함께…눈높이 맞춘 '부창부수' 진료

진료실에서는 한국 의료진의 헌신도 빛났다. 외과 김석권 교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20여 명의 환자를 돌봤다. 한 60대 여성 환자의 등에서 난 낭종(혹)을 발견하고는 "마취만 가능했어도 간단히 치료해 줄 수 있었는데…"라며 발을 동동 구르는 김 교수의 모습에는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하산종합병원에 차린 임시 진료소에서 바삐 환자를 돌보고 있는 그린닥터스 의료진. 사진=그린닥터스

안과 진료를 맡은 정근 이사장 곁에는 의사이자 아내인 윤선희 온병원 이사장이 어시스트로 나섰다. 크라스키노 역시 고령 인구가 많아 눈이 침침한 안과 환자들이 줄지어 찾아왔다.

정근 이사장이 환자를 진찰하고 처방전을 써주지만, 러시아 주민들은 처음엔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기 일쑤였다. 이때 윤선희 이사장이 자상하게 다가가 통역사를 통해 진료 내용을 다시금 쉽게 설명해 주자, 비로소 이들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내과 정종훈 원장의 진료실도 ‘부창부수’의 정석을 보여줬다. 고려인 통역사의 도움으로 여성 환자들을 진찰하는 정 원장의 곁에서, 부인 이은주 이사가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남편이 청진기를 대고 진찰한 후 처방전을 써주면, 이은주 이사는 그 처방전을 들고 현지 주민의 손을 따뜻하게 잡은 채 약국까지 직접 길을 안내했다.

진료 현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발견도 있었다. 소통 과정에서 오히려 어설픈 영어보다 ‘한국말’과 ‘한글 표기’가 현지인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왔던 것.

이웃에 사는 고려인 동포들을 통해 한국 문화를 접해온 이들에게 ‘K-의료’는 낯선 이방인의 기술이 아닌 이웃의 정이었다. 이날 진료소에서는 아나푸로, 베아제, 라벤다, 론소 등 한국의 의약품이 처방되며 총 70여 명, 210건의 진료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오후 1시쯤에는 예브게니 병원장이 직접 진료소 현장을 방문해 "국경을 넘은 헌신에 감사하다"며 봉사단원들을 격려했다.

대장암 3.5기 이겨낸 고려인 3세… 낡은 아파트서 터진 눈물

이날 봉사의 하일라이트는 진료소 아닌, 인근의 빛바랜 군인 아파트에서 일어났다. 지은 지 50년 넘은 낡은 건물. 의료진이 빗길을 뚫고 찾아간 곳은 고려인 3세 ‘문 류드밀라’의 집이었다.

류드밀라와 온병원 인연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17년 8월, 러시아에서 대장암 3.5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을 받고 절망하던 그녀는 기적적으로 온병원과 연결됐다. 온병원 의료진은 그녀의 '삶의 질'까지 고려해 인공항문을 차지 않는 방향으로 치료를 결정했고, 6개월 동안 4차례에 걸친 연쇄 수술 끝에 2018년 1월 그녀를 건강하게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정근 이사장은 2018년과 2019년 연해주 방문 때마다 그녀의 집을 찾아 상태를 살폈으나, 이후 코로나19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가로 막혀 왕진이 끊겼다. 그렇게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류드밀라를 7년 만에 다시 마주한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류드밀라는 거동이 다소 불편할 뿐, 얼굴빛은 몰라보게 건강했다. 오랜 세월을 거슬러 자신을 찾아온 정근 이사장과 그린닥터스 일행을 본 그녀의 눈시울이 이내 붉어졌다.

함께 간 정종훈 원장이 급히 청진기를 대고 진찰한 결과, 약간의 빈혈과 오랜 고립감으로 인한 우울 증세 외에는 암의 재발 흔적 없이 지극히 정상이었다. 회복 확률이 높지 않다던 대장암 3.5기를 이겨낸 것이다.

궁색하고 낡은 아파트 안, 거친 삶을 버텨낸 고려인 동포의 모습에 의료진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린닥터스와 김석권 교수는 즉석에서 마음을 모아 우리 돈 100만 원의 성금을 전달했고, 준비해 간 라면과 상비 의약품을 건넸다.

문 류드밀라씨가 정근 이사장(사진 오른쪽)에게 최근 자신의 근황을 얘기하고 있다. 사진=그린닥터스

정근 이사장은 한참 동안 류드밀라의 처진 어깨를 붙잡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세월 동안 품었던 걱정과, 살아서 만나 고맙다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앞으로도 꼭 건강하게 지내셔야 합니다.”

척박한 땅 연해주에서 암과 사투를 벌여온 고려인 3세 여인, 그리고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와 끝까지 환자를 책임지려 한 대한민국 의료진. 이들 가슴으로 이어진 따스한 공감은 비 내리는 크라스키노 현지의 지독한 한기조차 녹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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