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태의 종 이야기(35)
남녀의 사랑을 신앙에게 바친 아탈라
인디언 처녀 포카혼타스와 영국청년 스미스의 사랑을 다룬 디즈니의 애니매이션 ‘포카혼타스(1995)’를 관람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름다운 인디언 소녀의 사랑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문학작품도 있다. 아래 사진 속 탁상 종의 주인공은 프랑스 작가 사또브리앙의 [아탈라(Atala)]의 주인공 인디언 소녀 ‘아탈라’이다. 높이 19.5 cm. 1.5 kg의 묵직한 탁상종은 세계의 종들을 소개한 [종의 세계 World of Bells]의 표지로 실리기도 했다. 인디언의 아탈라는 양 손에는 종채를 들고 있다. 왼손에 잡은 채를 밑으로 당겼다가 놓으면, 오른 쪽의 채가 들렸다가 내려오며 그 중력으로 종소리를 내는 탁상종이다.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제작되었다.
[아탈라]는 1801년에 발표된 ’샤토브리앙’의 서사시적 소설이다. 그가 북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며 깊은 영감을 받은 후 받아썼으며, 발표 첫 해에만 5판이 인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 내용은 이미 단편적인 서사시로 발표되었으나, 1802년 [기독교의 정수]라는 책의 일부로 다시 발표되었다. 작가는 책에 기록된 북아메리카 대륙 남부의 풍경은 본적이 없다고 하니, 이 이야기가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책의 내용은 세미놀 인디안 부족에게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지던 73세의 영웅 ‘칵타스’의 이야기를 칵타스 본인의 관점에서 구술된 것이다. 그 당시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루이지애나주를 사이에 두고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소설은 그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미국의 원시적인 대자연과 토착민의 풍속을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로 서술함과 동시에, 남녀의 치열한 연애, 그리고 그리스도교 정신을 더한 참신한 문학작품이었다. 후일 낭만파 문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된 프랑스 문학사의 기념비가 된 걸작이다.

칵타스는 17세에 그의 아버지가 무스코지 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플로리다의 성 아구스틴으로 도망하였다. 그는 2년 반 동안 스페인 사람 로페즈의 집안일을 돌봐주며 지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나, 무스코지 세미놀 인디언에게 나포된다. 세미놀 추장 시마간은 그를 화형 시킬 것을 명령한다. 부족의 여성들은 그를 불쌍하게 여기고, 몇 주일 동안의 이동 기간 중에 그를 돌보아 준다. 추장 시마간의 딸 아탈라는 그를 도망시키려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사실 아탈라는 추장의 딸이 아니라, 이 고장 토착민 여자와 스페인 사람 로페즈의 혼혈아였다. 이동 행렬이 도착하는 날, 칵타스의 손을 묶은 결박이 느슨해졌고 아탈라의 도움을 받아 그는 탈출에 성공한다.

아탈라는 칵타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에 눈뜬 그녀였지만,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아내가 되겠다’는 맹세의 준엄함을 깨닫는다. 인간의 사랑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던 아탈라는 칵타스와는 맺어질 수가 없음을 알고, 독약을 마신다. 오브리는 그녀가 단순히 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아탈라는 칵타스에게 독약을 마셨다고 고백하게 된다. 칵타스와의 사랑은 그녀 자신의 생애를 걸었던 신앙의 포기를 의미했고, 아탈라는 사랑을 신앙에게 바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녀는 죽기 전 칵타스에게 현세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으니,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결합을 청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부탁하였다. 칵타스는 분노하였으나, 그리스도가 후일 그들의 재결합 맹세를 허락하였다는 수도승의 말을 듣고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녀의 장례를 치른 후, 수도원을 떠난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아탈라]에는 오브리와 프랑스 청년 르네, 칵타스 모두가 결국 치로키 인디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며 끝을 맺고 있다.

‘프랑스와-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자작은 1768년 프랑스 생말로에서 퇴락한 가문의 열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선장이었으나, 나이가 들어서는 노예무역에도 종사하였다. 아버지는 항상 시무룩하고 말이 없는 소통불능의 사람이었고, 어머니와의 관계도 좋지 못하였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신경질적인 누나였는데, 그녀도 젊어서 죽었다. 그는 무뚝뚝한 아버지가 자아내는 공포 속에서, 늘 불안정한 누나, 그리고 무료한 생활 속에서 방황하며 성장하였다고 한다.
그는 20세에 나바레에 주둔하던 부대의 중위로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1788년 파리를 방문하는데, 거기서 당시 유명했던 여러 작가들을 만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상당히 동조적이었으나 폭동과 사회 혼란이 계속되자 피로감을 느낀다. 군대를 사임하고 1791년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나, 모피상인과 함께 여행을 하며 인디언을 접하는 등 추억할 만한 체험을 하였다. 그 곳에서의 경험은 ‘아탈라’, ‘르네’의 근원이 되었는데, 잘 보존된 미국 남부 자연에 대한 생생한 기록은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1800년 파리로 다시 돌아와 그는, 자유기고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계속 작품을 썼다. 인디언에 대한 서사시 ‘아탈라’도 발표했다. 그리스도교를 찬양한 논문[그리스도교의 정수 (1802)], 가톨릭을 국교로 부활시킨 나폴레옹과 왕당파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종교가 꿈이기도 하나 또한 현실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그를 로마 대사관의 1등 비서관으로 임명하였으나, 앙기앵 공작을 내란음모죄로 몰아 혐의가 불충분한데도 성급하게 처형한 것에 항의하여 사직한다. 그는 1814년 부르봉 왕조의 부활과 함께 정치활동을 재개하였고, 자작 작위를 받았다. 1821년부터 베를린 대사, 런던 대사를 지냈고, 과격 왕당파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다. 이후로는 1년간 로마 대사를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고상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죽음 저편의 회상’은 그가 죽은 뒤에 출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