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9월 17일 (목)

"왼쪽, 툴 '그래스퍼' 주세요"⋯로봇이 알아듣고 건넸다

삼성서울병원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 세계 최초 협업시연⋯"다빈치는 조종하는 로봇, 이번엔 알아듣는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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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서울병원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 개발진이 16일 취재진 앞에서 모의 수술 시연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최지연 기자

“가까이. 아래로⋯ 왼쪽. 툴 ‘그래스퍼’ 주세요.”

16일 오후 서울 삼성생명 일원역빌딩 9층 강의실에서 열린 수술보조로봇 시연회.

집도의가 명령하자 파란색 수술 가운을 입고 양옆에 서 있던 수술보조로봇들이 신중하게 움직였다. 집도의의 지시에 따라 내시경 시야를 조정하고, 수술대 위 여러 도구 가운데 요청받은 집게 형태의 수술기구인 ‘그래스퍼(grasper)’를 찾아냈다. 이어 집도의가 안전하게 잡을 수 있도록 손잡이 방향과 전달 위치를 조정해 건넸다.

“이로써 담낭이 완전히 절제됐습니다.”

10분쯤 지났을 무렵, 시연을 중계하던 정규환 지능형의료로봇연구센터 교수의 설명과 함께 염소 간을 대상으로 한 담낭절제술이 무사히 끝났다. 숨죽여 지켜보던 취재진과 관계자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집도의의 지시를 이해해 내시경을 움직이고 필요한 수술도구를 건네는 수술보조로봇이 의사와 한 팀을 이뤄 수술을 마친 세계 최초의 시연이었다.

삼성서울병원은 이날 지난 1년여간 개발해온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을 처음 공개했다. 삼성서울병원은 2025년 보건의료 난제 해결을 위한 고난도 연구개발 사업인 ‘한국형 ARPA-H’의 주관 기관으로 선정돼 ‘효율적 수술환경 조성을 위한 휴머노이드형 피지컬 AI 기반 수술보조로봇 개발’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레인보우로보틱스, 에이딘로보틱스, 하해호, 삼성융합의과학원, 서울대, 국립암센터, 전북대병원 등과 컨소시엄 ‘오케스트라(ORchestra)’를 구성해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을 개발 중이다.

오케스트라는 5년간 진행되는 연구개발 과제로, 이번 시연은 2차년도 중반까지 거둔 연구 성과를 공개하는 자리였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수술도구 전달·회수, 내시경 조작, 조직 견인, 음성 명령 이해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지능형 수술 조수’를 개발하는 것이다.

현재는 이들 기능을 검증하는 단계다. 향후 반복 성능 시험과 모의환경·전임상 시험, 의료진 사용성 평가, GMP 품질체계 구축, 임상시험 및 의료기기 인허가 등을 거쳐 상용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그래픽=윤상선 기자

해외에서 개발 중인 수술로봇이 특정 동작을 사람 수준 또는 그 이상으로 수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삼성서울병원은 여러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이 수술 맥락을 공유하며 의료진과 하나의 팀처럼 협업하는 수술실 운영 시스템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설명했다.

연구책임자인 정용기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이날 시연에 앞선 브리핑에서 “다빈치 로봇 같은 기존 수술로봇이 의사가 콘솔에서 조종하는 정밀 도구였다면, 이번에 개발하는 로봇은 휴머노이드 형태의 수술보조로봇”이라며 “AI를 활용해 집도의의 수술 과정을 이해하도록 학습시켜 음성 명령을 알아듣고 그에 맞게 움직이는 기술을 수술 현장에 적용했다”고 말했다.

특히 기존 수술실 구조나 도구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휴머노이드 형태를 채택해 도입 비용을 낮추고 의료진이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개발진은 사람이 수술하기 어려운 환경이나 반복적이고 고된 작업이 필요한 영역에서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이 의료진을 지원하면 환자에게 보다 유리한 수술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정 교수는 “제한된 의료인력으로도 수술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숙련된 수술보조 인력을 구하기 어려운 야간·응급 및 필수의료 현장의 인력 공백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만 향후 상용화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출혈이나 연기가 발생하는 실제 수술 환경에서 AI의 안전성을 확보해야 하고, 사람처럼 조직의 긴장도를 감지하며 당기는 정밀 견인 기술도 고도화해야 한다. 절개와 봉합 같은 고난도 술기 역시 추가 연구가 필요한 영역이다.

로봇 오작동으로 환자나 의료진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때 법적 책임을 어떻게 규정할지에 대한 제도적 검토도 필요하다. 개발진은 “프로젝트가 2단계에 진입하면 관련 기관과 협의해 기술 개발과 함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은 2029년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첫 임상시험을 실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담낭절제술과 뇌하수체종양절제술 등 주요 수술을 대상으로 4개 병원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개발진은 저위험 업무부터 시작해 내시경 유지, 복강경 시야 조정, 조직 견인 순으로 적용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삼성서울병원의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 개발은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이 지원하는 ‘2025 한국형 ARPA-H 프로젝트’의 하나로 추진된다. 연구 기간은 2025년 7월부터 2029년 12월까지 총 54개월이며, 정부 연구개발비 138억3500만원이 투입되는 경쟁형 과제다. 2026년 말 1단계 경쟁평가를 거쳐 2단계 진입 여부가 결정된다.

삼성서울병원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 개발진. 오른쪽부터 정용기 이비인후과 교수(연구책임자), 배주영 성형외과 교수, 정규환 지능형의료로봇연구센터 교수, 오남기 이식외과 교수. 사진=삼성서울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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