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세포는 성장을 부추기는 유전자를 켜는 것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정상 세포가 암으로 변하는 것을 막는 유전자를 아예 읽지 못하도록 잠그기도 한다. 일부 갑상선암에서 이런 '유전자 잠금'이 일어나는 원리를 한국 연구팀이 찾아냈다.
서울대병원은 서울의대 약리학교실 이철환 교수, 서울대병원 유방내분비외과 이규언 교수,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류제경 교수 공동 연구팀이 갑상선암 환자의 종양 조직과 실험실에서 배양한 세포, 동물모델을 분석해 'EZH1 Q571R' 돌연변이의 작동 원리를 규명했다고 24일 밝혔다.
EZH1 Q571R은 EZH1 단백질의 571번째 아미노산이 글루타민(Q)에서 아르기닌(R)으로 바뀐 돌연변이다. 갑상선 호르몬을 만드는 여포세포에서 생기는 '여포성 갑상선암'과 미토콘드리아가 많아 현미경 염색에서 붉게 보이는 세포로 이뤄진 '호산성 갑상선 종양'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그간 이 변이가 어떤 방식으로 암 진행에 관여하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 돌연변이가 DNA 염기서열을 바꾸지 않고도 종양 억제 유전자가 작동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 여포성 갑상선암의 진행을 촉진한다고 밝혔다.
2023년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갑상선암 유병자는 58만7292명으로, 전체 암 유병자의 21.5%를 차지해 암종 가운데 가장 많았다. 암 유병자는 1999년부터 2023년 사이 암 확진을 받고 2024년 1월 1일 기준 치료 중이거나 완치된 사람을 뜻한다.

유전자 끄는 표지가 왜 엉뚱한 곳까지 번질까
DNA는 히스톤이라는 단백질에 감겨 '염색질'이라는 구조로 포장돼 있다. 포장이 느슨하면 세포가 해당 유전자를 읽어 단백질을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촘촘하게 뭉치면 유전자에 접근하기 어려워져 작동이 억제된다.
EZH1은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단백질 복합체인 PRC2의 구성 요소다. 히스톤에 'H3K27me3'라는 억제 표지를 붙여 특정 유전자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한다.
연구팀이 생화학·단일분자·후성유전체 분석을 진행한 결과, Q571R 변이가 생기면 EZH1의 효소 활성뿐 아니라 염색질을 뭉치는 힘도 강해졌다. 그 결과 유전자 작동을 억제하는 표지가 원래 활발하게 작동해야 할 영역까지 번졌다. 활성 영역과 억제 영역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주요 종양 억제 유전자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이런 변화는 실험실 분석에만 그치지 않았다. EZH1 Q571R 변이가 있는 환자의 갑상선 종양 조직에서도 종양 억제 유전자의 발현이 줄어 있었다. 동물실험에서는 이 돌연변이가 정상형보다 암 성장을 약 34% 촉진했다.
같은 위치의 EZH2 변이는 왜 달랐을까
연구팀은 EZH1과 구조가 비슷한 단백질인 EZH2에도 같은 위치의 돌연변이 'Q570R'을 만들어 비교했다. 이 과정에는 '자기 집게 분석'이 활용됐다. 자기장을 이용해 DNA와 단백질 복합체에 미세한 힘을 가하면서 염색질이 얼마나 강하게 뭉치는지 측정하는 단일분자 분석법이다.
분석 결과 EZH2 Q570R도 억제 표지를 붙이는 효소 활성은 높아졌지만, EZH1 Q571R처럼 염색질을 강하게 뭉치지는 못했다. 연구팀은 두 돌연변이의 암 촉진 능력을 가른 핵심이 효소 활성 자체보다 염색질 응축 능력에 있다고 해석했다.

연구팀은 이번 결과가 갖는 의미를 각자의 관점에서 짚었다.
이철환 교수는 돌연변이의 기능을 분자 수준에서 처음 설명해냈다는 점에 의미를 뒀다. 그는 "EZH1 Q571R 돌연변이의 기능을 분자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이며, 향후 후성유전 관련 변이의 생물학적 기전을 표적으로 하는 치료 전략으로 연구를 확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규언 교수는 돌연변이의 작동 기전이 갖는 의미를 중시했다. 그는 "이번 연구를 통해 EZH1 Q571R 돌연변이가 종양 억제 유전자 발현을 차단하고 암 성장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염색질 응축 능력이 이를 좌우하는 핵심 요인임을 규명한 데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류제경 교수는 이번 연구가 여러 학문을 아울렀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의료·생물·오믹스·물리를 융합한 접근을 통해 단분자 생물물리 기법으로 EZH1 Q571R 돌연변이가 염색질 응축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최초 규명한 것은 뜻깊은 성과"라고 전했다.
이 결과, 바로 치료로 이어질까
다만 이번 성과는 특정 돌연변이가 암을 촉진하는 분자 원리를 밝힌 기초 단계의 결과다. 환자에게 바로 적용할 치료법을 개발했거나 기존 치료제의 효과를 검증한 것은 아니다. 연구팀은 앞으로 이 돌연변이가 유전자 작동을 바꾸는 원리를 겨냥한 치료 전략을 모색할 계획이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Molecular Cell》 온라인판에 7월 3일 공개됐다. 논문명은 ‘갑상선암 관련 EZH1 Q571R 돌연변이가 염색질 응축을 강화하고 H3K27me3 억제 표지를 활성 염색질까지 퍼뜨린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