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런 병 없이 건강하던 70세 모로코 여성이 어느 날 동네를 산책하다가 갑자기 기절해 쓰러졌다. 어지럽거나 가슴이 답답한 느낌도 전혀 없었는데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정신은 바로 돌아왔지만, 놀란 마음에 급히 라바트 모하메드 5세 군의대 부속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이 환자의 심장 박동수는 1분에 고작 28회였다. 건강한 사람(분당 60~100회)의 절반에도 못 미칠 만큼 심장이 느리게 뛰고 있었다. 심전도 검사 결과는 더 충격적이었다. 심장 윗방향(심방)에서 아랫방향(심실)으로 신호를 보내는 전기 길이 완전히 막혀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 신호가 완전히 끊겨 심장이 멈추는 위험한 ‘방실의 완전 차단’ 상태였다.
연구팀은 즉시 인공 심박조율기를 임시로 넣어 전기 신호를 보냈고, 이후 가슴 속에 전기를 계속 보내주는 영구 심박조율기를 심어 맥박을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였다. 멀쩡하던 전기 길이 왜 막혔을까? 연구팀은 심장을 딱딱하게 굳게 만드는 희귀병인 ‘트랜스티레틴 심장 아밀로이드증’을 원인으로 밝혀냈다. 이 병은 나쁜 단백질이 달라붙고 쌓여 심장이 굳는 병이다.
연구팀은 이 환자의 심장을 초음파 검사로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심장 벽이 정상보다 훨씬 더 두껍게 부풀어 있었고, 심장 벽 사이가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게다가 심장의 수축 기능, 즉 피를 짜내는 힘이 정상 기준(55~60% 이상)에 한참 못미치는 33%로 뚝 떨어져 있었다.
연구팀은 심장의 미세한 움직임을 보는 특수 초음파 검사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냈다. 심장의 다른 부위는 아예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굳어버렸고, 심장 끝부분(심첨부)만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특이한 모습(심첨부 보존 현상)이 관찰됐다. 이는 심장 아밀로이드증 환자에게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다.
연구팀은 심장 MRI(자기공명영상)를 찍어, 심장 전체에 나쁜 단백질이 찌꺼기처럼 퍼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어 혈액 검사로 백혈병 관련 질환을 배제한 뒤, 뼈를 촬영할 때 쓰는 특수 카메라(골 신티그라피)로 가슴을 찍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갈비뼈보다 심장이 훨씬 더 밝고 강하게 불타오르듯 반짝이는 모습(페루지니 3등급)이 포착됐다.
연구팀은 환자의 가슴을 째고 심장 조직을 잘라내는 위험한 수술을 하지 않고, 다양한 사진(다중 모달리티 영상)을 비교해 이 병을 신속·정확하게 진단했다. 환자는 심박조율기 이식 직후부터 치료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치료 3개월 후 추적관찰에서 환자는 기절하는 일도, 숨이 차는 증상도 없이 매우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다.
이 사례 연구 결과(Complete Heart Block Unmasking Transthyretin Cardiac Amyloidosis: A Multimodality Imaging Case Report)는 최근 국제 학술지 《큐레우스(Cureus)》에 실렸다.
트랜스티레틴(Transthyretin)을 비롯한 정상적인 단백질은 평소 영양소 운반 등 좋은 일을 한다. 하지만 노화나 유전 변이 등으로 구조가 깨져 낱개로 쪼개지고, 분해되지 않는 끈적한 찌꺼기(섬유)로 엉겨 붙는 순간 장기를 망가뜨리는 ‘독성 아밀로이드’ 단백질로 돌변한다. 낱개로 쪼개져 기형적으로 변한 이런 나쁜 단백질 상태에 대해 ‘단백질이 잘못 접혔다(Misfolding)’라는 표현을 쓴다. 독성 아밀로이드 단백질은 인체의 곳곳에 달라붙어 쌓일 수 있다.
트랜스티레틴은 갑상선 호르몬인 ‘티록신(Thyroxine)’과 비타민 A인 ‘레티놀(Retinol)’을 운반하는 단백질이다. 이 환자의 ‘트랜스티레틴 심장 아밀로이드증’은 간에서 만들어지는 이 단백질이 비정상적으로 접힌 단백질로 변하면서 시작된다. 이 나쁜 단백질 찌꺼기는 온몸을 떠돌다 심장 근육 세포 사이사이에 달라붙어 굳어지며 심장 벽을 단단하게 만들고, 심장을 망가뜨린다. 이 사례 속 환자의 상황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환자의 ‘트랜스티레틴 심장 아밀로이드증’은 예전에는 매우 희귀한 병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의료 기술과 장비의 발전으로 실제로는 고령층 환자가 꽤 많은 것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종전 연구 결과를 보면 심장이 두꺼워진 60세 이상 심부전 환자 10명 중 1명 이상(약 13%)이 실제로 이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노인이 병명도 모른 채 앓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독성 아밀로이드 단백질은 심장 근육에만 쌓이는 게 아니다. 심장이 뛰도록 전기를 통하게 해주는 미세한 심장 전도계에도 들러붙는다. 이 때문에 전기 신호가 가다가 막혀 맥박이 멈칫하거나 뚝 떨어지는 부정맥이 찾아온다. 이 병을 앓는 환자 10명 중 약 1명은 몸 속에 인공 심박조율기를 심는다.
심장에 이상이 생기기 몇 년 전부터 몸은 다른 곳에서 미리 신호를 보낸다. 대표적인 것이 양쪽 손목이 저리고 아픈 ‘손목 터널 증후군’이다. 이 외에도 허리 뼈가 좁아져 아픈 ‘척추관 협착증’, 무거운 것을 들지도 않았는데 팔 근육 줄이 툭 끊어지는 현상, 누웠다 일어날 때 머리가 핑 도는 기립성 저혈압 등도 나쁜 단백질이 온몸에 쌓이면서 생기는 경고 신호다. 이번 사례처럼 첫 증상으로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기절해 병원을 찾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다행히 이 나쁜 단백질 찌꺼기가 심장에 더 쌓이지 못하게 막아주는 치료제(타파미디스)가 개발돼 쓰이고 있다. 간에서 이 불량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는 최첨단 치료제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맥박이 느려지거나 심장이 두꺼워진 현상을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 특히 손목터널증후군이나 허리 협착증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 고령자의 경우 심장이 굳어가는 이 병을 의심해봐야 한다. 일찍 발견해 약을 먹기 시작하면 여생을 건강하고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손목터널증후군이 있으면 나중에 심장병이 생기나요?
A1.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손목터널증후군은 가사노동이나 일상생활 중 손목을 많이 써서 생기는 아주 흔한 병입니다. 다만 이 병을 앓고 있는 나이 든 사람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숨이 차거나, 몸이 붓는 증상이 나타나고 심장 벽이 두껍다는 진단을 받으면 심장 아밀로이드증 검사를 꼭 받아봐야 합니다.
Q2. 뼈 사진(뼈 신티그라피)을 찍는데 어떻게 심장병을 찾아낼 수 있나요?
A2. 심장에 쌓이는 불량 단백질(트랜스티레틴)은 뼈 검사를 할 때 쓰는 약물에 자석처럼 강하게 달라붙습니다. 이 약물을 몸에 넣고 사진을 찍으면, 다른 심장병 환자와 달리 이 병을 앓는 환자의 심장은 뼈보다 훨씬 더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것이 관찰됩니다. 이 사진 덕분에 심장 조직을 굳이 떼어내지 않고도 안전하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Q3. ‘트랜스티레틴 심장 아밀로이드증’은 자손에게 유전이 되나요?
A3. 이 병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부모와 상관없이 단순히 나이가 들면서 노화 때문에 몸속 단백질이 변해서 생기는 ‘노인형’과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겨 발병하는 ‘유전형’이 있습니다. 따라서 병을 진단받으면 유전자 검사를 꼭 하게 됩니다. 유전형으로 판명되면 자녀도 미리 유전자 검사를 받아 예방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