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생기기 전, 그 건강하던 때로 돌아가자면..."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⑧ 차와 분석심리학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차를 마시면 의식이 평온해진다. 그에 관해 졸저 ‘차 오디세이’(이른아침출판사, 2020)에 분석심리학적 견해를 실은 적이 있다. 조금 수정하여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40대 중반, 감정이 심하게 으스러졌다. 휘청거리는 감정의 병리적 현상을 이해하고 내 마음의 뿌리를 들여다보기 위하여 대단히 큰 결심을 하였다. 칼 융 심리분석학자에게서 정신분석을 받기로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밤 내 꿈을 적어 내 무의식의 흐름을 분석 받기를 5년 이상 지속하였다.

머리맡에서 적은 꿈을 분석 받으며, 나는 내 무의식 아래에서 나를 지배하는 인류 보편의 원초적 행동 유형들을 알 수 있었다. 그 기간 중 여러 날 밤 나는 꿈속에서 내 무의식의 아주 깊은 심연으로 들어갔다. 마치 신화나 전설 같은 무대가 펼쳐졌다.

나는 그 무대 속에서 수많은 인물과 어울려 옛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사실상 신화/전설/민화는 내 무의식의 원형이고 내 정체성의 일부임을 확인하였다. 이 집단 무의식이 내 개인 무의식을 결정하고, 나의 의식은 또 내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 현재의 내 모습으로 살아간다.

차를 마시면 의식이 평온하여진다. 의식의 평온 아래에는 내 개인 무의식의 평온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집단 무의식의 평온이 있다. 음다(飮茶)는 궁극적으로 내 심연의 집단 무의식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음다는 나를 이루는 신화 전설 민화 속 등장 인물들에게 찻물을 공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속 등장인물들이 찻물을 마시고 어떤 평형에 이르러 내 마음은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차는 설화로 가득 찬 음료이다. 신화의 음료, 전설의 음료이다. 그리고 차는 내 내부에 들어와 내 무의식 속 신화와 전설의 주인공들을 적셔 고요하게 한다.”

차는 과거부터 수도(修道)의 도구로 쓰였다. 무의식과 의식의 평온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도의 도구로 쓰인 또 다른 이유는 각성시켜 의식을 또렷하게 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다...마음의 빗장이 열리다

차는 의식을 깨우지만, 커피와 같은 중추신경자극제와는 효능이 다르다. 의식을 날카롭지 않고 평온하게 유지하도록 돕는다. 종교인의 수도라는 목표를 가지지 않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면서 또렷하게 의식하도록 도와주는 차는 심리치료를 위한 좋은 수단이 된다.

차는 또한 좋은 대화 수단이다. 차를 마시면 들뜨지 않고 대화하게 된다. 차를 마시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 자신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과정은 치유의 출발점이다. 차를 놓고 대화하면서 마음 깊은 곳 이야기가 올라왔다면 그 차 모임은 치유모임이 된다.

수년 전부터 다회(茶會)를 통한 심리치료의 가능성을 보았다. 은퇴 전에는 부울경의 어떤 암 요양병원을 찾아가 여러 달에 걸쳐 다회를 열면서 차가 암 환우들에게 주는 도움을 실제 목격하였다. 그리고 은퇴 후 현재 근무하는 암병원에서 꿈을 실현하고 있다.

그래서 내 카운슬링에는 늘 차가 동반된다. 내 책상에 차 판이 놓여있고 그 건너편에 암 환자가 앉는다. 나는 차를 우려낸다. 몇 잔의 차를 마시면 환자는 마음 깊은 곳 이야기를 술술 풀어 놓는다.

카운슬링은 정신상태나 심리상태가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바탕에서 출발한다. 최근의 학문 진전으로 정신-신경-면역-내분비계는 상호 영향을 주면서 작용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마음이 편하면 몸도 편하다”는 일반적인 경험은 이제 학문적으로도 입증되었다.

국가 표준항암치료는 발생한 암을 없애는 데 주력한다. 이런 노력으로 암은 ‘치료 가능한’ 병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국가의 표준항암치료는 국소 질병으로의 암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암은 전신(全身) 질병이다. 비록 국소 부위에서 증식하지만, 암은 몸 전체의 대사(代射) 이상으로 생겨나거나 대사 이상을 유발한다. 따라서 암은 전인적 치료가 필요하다.

"암은 국소질병이 아니다. 전신(全身)질병이다."

더군다나 사람의 건강에는 신체적 측면 외에 정신, 사회, 마음가짐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의 비중이 크다. 그러므로 암세포가 몸에서 사라지는 목표를 넘어 마음이나 영혼, 그리고 다양한 것과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야 참된 건강을 얻는다.

암 환자를 위한 심리치료로 큰 성과를 거둔 의사는 칼 사이먼턴이다. 그는 심리치료사인 아내와 함께 1971년 심리적 개입을 통하여 암 치료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를 시작하였다.

분석심리학 개척자 칼 융(왼쪽)과 암심리상담 개척자 칼 사이먼턴(오른쪽). [사진=유영현 제공]
그들은 ‘사이먼턴 요법’을 정립하고 꾸준히 임상 사례를 쌓았다. 1974년부터 1978년 사이 4년 동안의 임상 사례는 1981년 논문으로 간행되었다. 유방암 71명, 소화기암 28명, 폐암 24명 등 193명의 암 환자들의 심리상담은 암 환자들 생존율을 현저히 증가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질’(QoL)과 함께 ‘죽음의 질’도 개선하였다.

의사와 심리학자가 함께 만든 '사이먼턴요법', 전세계로 퍼져나간 이유

사이먼턴 요법은 암 환자에서 암 발생 이전의 건강을 회복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암을 없애면 된다는 생각으로 암세포가 사라지는 것만 바라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마음, 영혼, 그리고 다양한 것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잃었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이먼턴은 실재적인 방법들을 개발하여 적용하였다. 그는 환자가 살아가는 자세가 치료나 치유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관찰하고, 치료나 인생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야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여 치료법을 수립하였다. 그 핵심 과정은 심신일체(心身一體) 요법을 통한 명상, 완화, 불건전 사고 교정과 상상 요법 등이다.

그런데,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선 환자 자신의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암 환우들이 캠프 형태로 모여서 사이먼턴 요법을 시행하기도 하며, 온라인으로 교육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사이먼턴 교수 사후에도 사이먼턴 요법은 세계 각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

나의 카운슬링 바탕에는 분석심리학이 깔려있다. 하지만 무의식 탐색이 목표가 아니다. 항암치료 성적을 높이는 실질적인 프로그램인 사이먼턴 요법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상담자인 나는 내담자 중심 상담을 강조하였던 칼 로저스의 태도를 따른다. 무조건적 수용과 공감적 이해를 가지고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한다.

사이먼턴 요법에서는 깊게 생각하는 도구로 심호흡을 채용한다. 나는 특별히 불편하지 않다면 심호흡 대신 차 음용을 권한다. 차와 심호흡은 모두 인생의 이면을 생각하게 해주고 마음속 깊은 생각을 끄집어내어 주는 수단이지만, 이미 오랜 세월 수련의 도구로 사용되어 온 차가 마음을 집중하고 깊게 생각하는 데 심호흡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담자와 내담자의 몸과 마음 다스리기는 차에 맡긴다.

더군다나 차는 오랜 시간을 대화할 수 있게 한다. 우리 병원에서는 1:1 카운슬링을 보통 한 시간을 넘어 진행한다. 대학병원 5분 진료로는 상상할 수 없는 긴 대화를 나눈다. 차는 이 긴 시간, 늘 함께 한다.

유영현 앨앤더슨병원 진료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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