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급실에 대량 출혈 환자가 들어오면 의료진은 짧은 시간 안에 수혈 장비를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생명이 위급할 때 꼭 필요한 장비일수록 평소 사용 빈도가 낮아, 막상 응급상황이 닥쳤을 때 복잡한 조작법을 정확히 떠올리기 쉽지 않다.
증강현실(AR) 교육으로 이런 장비의 사용법을 미리 익히면 준비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종이 지침서로 배운 간호사는 급속 수혈장비 준비에 약 10분이 걸렸지만, AR 교육을 받은 간호사는 4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의학과 손명희 교수와 간호본부 응급간호파트 연구팀은 응급실 간호사를 대상으로 ‘Level-1 급속 주입기(Level-1 rapid infusion system)’ 사용법을 교육한 뒤 실제 수행능력을 비교한 무작위 대조 연구 결과를 24일 발표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JMIR 의학교육(JMIR Medical Education)》 최근호에 실렸다.
피 많이 빠져 장기에 혈액 공급 어려운 ‘저혈량성 쇼크’ 때 사용
Level-1 급속 주입기는 중증 외상이나 수술 중 대량 출혈처럼 짧은 시간에 많은 수액이나 혈액을 공급해야 할 때 쓰는 장비다. 수액과 혈액을 체온에 가까운 온도로 데우면서 빠르게 주입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가 발생했을 때 필요하다. 저혈량성 쇼크는 심한 출혈이나 체액 손실로 몸속을 도는 혈액량이 크게 줄어든 상태를 말한다. 혈압이 떨어지고 뇌와 심장 등 주요 장기에 혈액과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응급상황에서는 장비를 최대한 빨리 준비하면서도 연결 순서나 조작법을 틀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급속 주입기는 매일 사용하는 장비가 아니다. 평소 업무만으로 사용법을 충분히 익히고 숙련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실제 장비를 이용한 반복 교육 역시 장비와 교육 담당자, 교육시간을 함께 확보해야 해 자주 하기가 쉽지 않다.
연구팀은 이런 교육의 빈틈을 AR이 메울 수 있는지 살폈다.
AR은 사용자가 보고 있는 실제 사물 위에 글이나 영상, 그림 같은 디지털 정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이다. 가상현실(VR)처럼 시야 전체를 가상공간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이번 교육에서 간호사들은 ‘홀로렌즈2’를 착용한 채 실제 Level-1 장비를 직접 만졌다. 눈앞에는 지금 해야 할 조작과 필요한 준비물이 나타났고, 손을 대야 할 위치도 표시됐다. 복잡한 단계에서는 짧은 시연 영상도 볼 수 있었다.
삼성서울병원은 2022년부터 인공호흡기와 에크모(ECMO·체외막산소공급장치) 등 실제 의료기기 교육에도 AR을 활용해 왔다.
처음 배울 땐 더 오래 걸렸지만…준비시간 9.85분→3.67분
연구팀은 Level-1 장비를 사용한 경험이 없는 삼성서울병원 응급실 간호사 42명을 모집해 21명씩 무작위로 나눴다. 한 그룹은 AR로 사용법을 배웠고, 다른 그룹은 인쇄된 지침서를 보며 스스로 익혔다.
처음 배우는 데 걸린 시간은 오히려 AR 교육군이 길었다. 중앙값 기준 AR 교육군은 18.20분, 기존 교육군은 8.98분으로 두 배가량 차이가 났다.
그러나 학습을 마친 뒤 실제 장비를 조작하게 하자 결과가 뒤집혔다.
장비 준비시간의 중앙값은 기존 교육군 9.85분, AR 교육군 3.67분이었다. AR 교육군이 약 6분11초 빨랐고, 기존 교육군과 비교하면 준비시간이 62% 짧았다.
장비 준비부터 수액과 혈액 주입까지 포함한 전체 수행시간도 기존 교육군은 13.63분, AR 교육군은 5.83분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정확도에서도 AR 교육군이 앞섰다. 장비 작동 능력을 100점 만점으로 평가한 점수의 중앙값은 기존 교육군 70점, AR 교육군 90점이었다. 전체 조작 과정을 22단계로 나눠 평가했을 때도 정확히 수행한 단계의 중앙값은 기존 교육군 16개, AR 교육군 20개였다.
수행 도중 다른 의료진에게 도움을 요청한 횟수의 중앙값도 기존 교육군은 2회였지만 AR 교육군은 0회였다. 교육 만족도와 장비를 스스로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뜻하는 자기효능감 역시 AR 교육군에서 더 높았다.

왜 오래 걸려 배운 AR 교육이 실제 조작은 빨랐을까
AR 교육의 장점은 단순히 새로운 기기를 사용했다는 데 있지 않다. 실제 장비를 만지는 순간 필요한 정보를 바로 보여줬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종이 지침서로 장비를 배우면 설명을 읽고 장비를 확인한 뒤 다음 순서를 기억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지침서와 장비 사이를 오가며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지'를 계속 떠올려야 한다.
AR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실제 장비를 보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다음 단계와 손을 대야 할 위치가 나타난다. 필요한 준비물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설명서를 읽고 기억한 뒤 따라 하는 과정’을 ‘장비를 보면서 바로 따라 하는 과정’으로 바꾼 셈이다.
연구팀은 이런 단계별 시각 안내가 복잡한 조작 과정에서 한꺼번에 기억해야 할 정보의 부담을 덜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직접 따라 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지만, 장비를 실제로 만지면서 손의 움직임과 조작 순서를 함께 익힌 것이 이후 수행 속도와 정확도 향상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교육학에서는 사람이 한 번에 처리해야 하는 정보가 지나치게 많을 때 학습 효율이 떨어지는 현상을 ‘인지부하(cognitive load)’라고 부른다. AR이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순간에 나눠 보여주면서 이 부담을 줄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번 연구가 이러한 작동 원리까지 직접 입증한 것은 아니다. 참가자 모두가 Level-1을 처음 접한 간호사였고, 비교 대상도 강사가 진행하는 실습교육이 아니라 종이 지침서를 이용한 자율학습이었다. 이런 조건 때문에 두 교육법의 차이가 더 크게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환자 수혈시간 62% 줄였다는 뜻은 아냐
이번 결과를 AR 교육이 실제 대량 출혈 환자의 수혈 시작시간을 62% 줄였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연구팀이 측정한 것은 교육을 마친 간호사가 장비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다루는지였다.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수혈 시작시간이나 치료 결과, 생존율을 비교한 연구는 아니다.
교육 효과가 시간이 지나도 유지되는지도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한 병원 간호사 42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인 만큼 다른 병원이나 중환자실·수술실 등에서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나는지 검증해야 한다.
AR 장비 자체의 한계도 있다. 이번 연구에 사용한 홀로렌즈2는 무게가 566g이며, 한 번 충전하면 2~3시간가량 연속 사용할 수 있다. 삼성서울병원 연구진의 앞선 연구에서는 배터리 소모와 과열에 대비해 여러 대의 기기를 번갈아 사용하기도 했다.

손 교수는 “응급의료는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정확하고 신속한 대처가 필요하다”며 “자주 사용하지 않는 중요 의료기기와 다양한 임상 상황을 증강현실로 사전에 반복 학습한다면 의료진의 역량을 강화하고 예기치 않은 응급상황에 보다 체계적으로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는 실제 의료 현장에서 활용하기에 하드웨어적 한계가 남아 있다”며 “더 가볍고 편안하면서 성능이 향상된 차세대 기기가 등장하면 의료진 교육과 임상 현장에서 훨씬 자연스럽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는 보건복지부 재원으로 한국보건산업진흥원 보건의료기술연구개발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