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격이 건장하고 평소 앓는 병이 없던 28세 필리핀 남성은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와 칵테일을 밤새 마셨다. 이튿날 심각한 두통이 그를 엄습했다. 양쪽 뒷통수가 짓눌리듯 아팠고, 특히 기침을 할 때마다 머리가 쪼개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 먹어도 효과는 그때뿐이었다. 미열과 목 통증까지 나타나며 열흘 동안 극심한 두통이 지속되자 덜컥 겁이 난 그는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필리핀 마닐라 차이니즈 종합병원 및 의료센터 의료진이 실시한 머리 부위 자기공명영상(MRI)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큰 신경 섬유 다발인 ‘뇌량’에 혈류가 차단된 듯한 이상이 발견됐다.
연구팀은 일단 급성 뇌경색(허혈성뇌졸중)이라는 초기 진단을 내렸다. 연구팀은 즉시 뇌경색 치료에 쓰이는 항혈소판제(클로피도그렐)와 뇌기능 개선제를 투여하며 정밀 검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뇌경색에서 흔히 나타나는 사지 마비, 발음 어눌함, 감각 이상, 의식 저하 등 신경학적 증상이 이 환자에게는 전혀 없었다. 뇌혈관 컴퓨터단층촬영(CT) 검사와 경동맥 초음파, 24시간 홀터(심장박동) 검사, 뇌척수액 검사에서도 뇌혈관이 막히거나 찢어진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 환자에게 ‘뇌량(뇌 다리) 세포독성 병변’이라는 최종 진단을 내렸다. 좌우 뇌를 잇는 다리인 뇌량 부위에 일시적으로 수분이 차올라 부풀어 오르는 상태, 즉 세포독성 부종인 것으로 밝혀졌다.
환자는 입원 치료를 받으며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아 퇴원했다. 퇴원 10일 후 다시 MRI를 촬영했다. 그 결과 뇌경색처럼 선명하게 찍혔던 뇌량 부위의 이상 병변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례 연구 결과(Acute Binge Alcohol Consumption Presenting With a Cytotoxic Lesion of the Corpus Callosum (CLOCC) in a Young, Healthy Filipino Male: A Case Report With Features Overlapping the Proposed Marchiafava-Bignami Disease Spectrum)는 최근 국제 학술지 《큐레우스(Cureus)》에 실렸다.
이 사례는 단 한 번의 과도한 폭음도 뇌에 시한폭탄 같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질병관리청 및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면 국내 성인 인구의 알코올 사용 장애 유병률은 약 5~6% 수준으로 추산된다. 월간 폭음률(최근 1년 동안 한 번의 술자리에서 남성 7잔, 여성 5잔 이상 음주한 분율)은 성인 남성 기준 50%에 육박한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술을 마시는 폭음이 빚을 수 있는 주요 질병은 뇌 및 신경계 질환, 소화기계 질환, 심혈관계 질환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뇌 및 신경계 질환에는 뇌량 세포독성 병변, 급성 알코올 뇌증 및 알코올성 블랙아웃(단기 기억 상실), 마르키아파바-비냐미병 등이 포함된다. 이 사례 속 환자가 나타낸 뇌량 세포독성 병변은 MRI 검사상 뇌경색과 똑같이 보일 정도로 심각한 두통을 일으킨다. 원인을 없애고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다. 급성 알코올 뇌증 및 알코올성 블랙아웃은 갑자기 많이 들어온 알코올이 뇌의 해마 기능을 마비시켜 기억을 잃게 만들고 심하면 의식 장애나 호흡 저하를 일으키는 급성 중독 상태다. 마르키아파바-비냐미병은 주로 만성 음주자나 대량 폭음 후 대사 장애로 인해 뇌량이 탈수초화(신경 섬유 피복이 벗겨짐)하고 괴사하는 뇌질환이다.
둘째, 소화기계 질환에는 급성 췌장염을 비롯해 급성 위염 및 위궤양, 급성 알코올성 간염, 말토리-바이스증후군 등이 포함된다. 급성 췌장염은 폭음이 일으키는 대표적인 응급 질환이다. 알코올이 췌장 세포를 직접 자극하고 췌관을 수축시켜, 췌장에서 분비된 소화효소가 췌장 스스로를 소화해 버리는 급성 염증을 일으킨다. 윗배와 등 뒤를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동반한다. 고농도의 알코올은 위 점막의 보호막을 직접 파괴해 급성 출혈성 위염이나 궤양을 유발하며, 심한 속쓰림과 위통 증상을 나타낸다. 단기간의 폭음만으로도 간세포가 급격히 파괴되고 염증이 생겨 황달, 피로감, 우상복부 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 말토리-바이스증후군은 폭음 후 심하게 구토를 하는 과정에서 위와 식도 경계 부위의 점막이 찢어지면서 많은 피를 토하는 병이다.
셋째, 심혈관계 질환에는 휴일심장증후군, 급성 고혈압 및 혈관 수축이 포함된다. 휴일심장증후군은 평소 심장병이 없던 사람도 주말이나 연휴에 폭음을 하면 갑자기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부정맥(특히 심방세동)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가슴 두근거림, 호흡곤란, 흉통이 나타나며 뇌졸중 위험을 높인다. 많은 술을 한꺼번에 마시면 교감신경이 자극을 받아 혈압이 급상승하며, 이는 뇌혈관이나 심장혈관에 무리를 주어 급성 심근경색이나 뇌출혈의 위험을 높인다.
이번 사례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젊고 특별히 앓는 병이 없다고 폭음의 위험에서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단 한 번의 과음도 뇌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 음주 후 며칠씩 두통이 이어지거나 기침만 하면 악화하는 이상 두통이 발생하면 서둘러 병원을 찾아야 한다.
[자주 묻는 질문]
Q1. 폭음 후 발생한 두통이 단순 숙취 두통인지, 뇌 손상 신호인지 어떻게 구분하나요?
A1. 일반적인 숙취 두통은 물을 충분히 마시고 휴식을 취하면 하루 안에 좋아집니다. 하지만 기침을 하거나 힘을 줄 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거나, 진통제를 먹어도 수일 이상 통증이 지속되고 미열이나 어지럼증이 동반된다면 뇌량 세포독성 병변 등 뇌 내부의 독성 반응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경과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Q2. MRI에서 뇌경색 소견이 나왔다면 며칠 만에 저절로 완치될 수도 있나요?
A2. 진짜 뇌경색(허혈성 뇌졸중)은 뇌세포가 괴사하는 병이므로 한 번 발생한 병변이 며칠 만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번 사례처럼 10일 만에 영상학적 병변이 깨끗이 사라졌다면 뇌경색이 아닙니다. 뇌세포가 일시적으로 부어올랐다 가라앉는 '뇌량 세포독성 병변'일 확률이 높습니다.
Q3. 평소에 술을 자주 마시지 않고 건강한 사람도 단 한 번의 폭음으로 이런 뇌 손상이 생길 수 있나요?
A3.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보고된 28세 남성 환자도 평소 앓는 병이 전혀 없고 만성 알코올 중독도 아니고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평소 음주 습관과 상관없이 단 하루 만에 대량의 알코올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뇌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지면서 뇌량 부위에 급성 세포독성 부종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