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GSK의 글로벌 임상 연구에서 상위 10개 시장에 꼽힙니다. 지금 이곳에서는 70개가 넘는 임상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임상시험이 활발하다는 것은 단순히 연구 건수가 많다는 뜻이 아니다. 신약 개발에 필요한 환자를 적기에 모집하고, 복잡한 시험 절차를 국제 기준에 맞게 운영하며,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확보할 의료기관과 연구진의 역량이 갖춰졌다는 의미다. 특히 종양학과 혈액암, 면역질환처럼 환자 특성을 세밀하게 구분해야 하는 분야에서 이러한 연구 기반은 글로벌 개발 전략을 좌우하는 경쟁력이 된다.
취임 1주년을 맞은 구나 리디거 한국GSK 대표이사는 한국 시장의 중요성을 매출이나 판매 제품 수가 아닌 ‘임상개발 역량’으로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신약 허가를 앞둔 임상 3상뿐 아니라 개발 초기 단계인 임상 1·2상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이 이미 개발된 의약품을 들여와 판매하는 시장을 넘어 글로벌 신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전략 거점이라는 의미다.
코메디닷컴은 최근 리디거 대표를 만나 지난 1년 동안 경험한 한국 제약·바이오 시장의 특징과 향후 사업 방향을 들었다. 올해는 GSK가 한국에 법인을 설립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브라질 출신인 그는 GSK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며 중남미와 글로벌 백신 사업을 거친 뒤 한국 법인을 맡았다.
“판매시장 아닌 개발 파트너”…글로벌 신약 개발에 직접 참여
리디거 대표가 이 시장을 높게 평가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의료 인프라와 연구진의 전문성이다. 국내 대형 의료기관들은 암과 혈액질환, 면역질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임상을 수행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의료진과 임상 연구자도 다수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한국의 보건의료 인프라는 놀랍고 인상적인 수준”이라며 “의료진과 임상시험 연구자, 다양한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세계적 수준의 연구 환경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임상 연구는 국내 환자만을 대상으로 한 별도 프로그램이 아니라 GSK가 세계 각국에서 추진하는 글로벌 신약 개발 과정의 일부다. 의료기관에서 축적한 치료 효과와 안전성 자료는 신약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근거에 포함되고, 의료진과 연구진의 경험도 후속 임상과 개발 전략을 세우는 데 활용된다.
리디거 대표는 “진행 중인 임상 연구는 GSK의 글로벌 신약 개발 프로그램에 직접 포함돼 전 세계 연구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며 “성장 가능성이 큰 시장일 뿐 아니라 GSK의 글로벌 연구개발 전략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국가”라고 강조했다.
환자에게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신약의 초기 임상부터 참여하면 기존 치료로 충분한 효과를 보지 못한 환자들이 새로운 후보물질을 상대적으로 이른 단계에서 접할 기회가 생긴다. 환자의 임상적 특성과 실제 치료 환경이 글로벌 개발 자료에 반영되면서 향후 허가와 진료 현장에 필요한 근거를 확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임상 넘어 글로벌 공급망으로”…생산·바이오 협력 확대
이러한 역할은 임상시험에 머물지 않는다. 현지 기업이 보유한 생산시설과 기술력도 GSK의 글로벌 공급망을 뒷받침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바이오로직스와의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 협력이다. 이곳에서 확보한 생산 역량은 국내 공급을 넘어 GSK 제품의 세계 시장 수요를 지원하는 데 활용된다.
리디거 대표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의 협력은 파트너가 보유한 역량과 인프라를 활용하는 구체적인 사례”라며 “한국 내 수요뿐 아니라 글로벌 차원의 수요를 지원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제약사와는 의약품 영업을 맡기는 영업위탁(CSO) 방식으로도 협력하고 있다. GSK가 개발한 의약품과 국내 기업의 영업망을 연결해 더 많은 의료진과 환자에게 치료 옵션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임상개발에서 생산과 상업화까지 현지 기업과의 협력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셈이다.
리디거 대표는 바이오기업과의 연구개발 협력도 확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최근에는 GSK 글로벌 조직의 의학 부문 최고책임자(CMO)와 최고환자책임자(CPO)가 한국을 찾아 과학·바이오업계와 협력을 강화할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한국에는 매우 활발하고 매력적인 바이오텍 혁신 생태계가 형성돼 있다”며 “이곳에서 나온 과학적 성과가 한 국가에만 머무르지 않고 세계 환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도록 협력 범위를 확대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개발된 기술을 GSK의 글로벌 임상·허가·생산망과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바이오기업은 연구 성과를 세계 시장에서 검증하고 사업화할 통로를 확보할 수 있고, GSK는 우수한 기술과 연구 역량을 글로벌 신약 파이프라인에 접목할 수 있다.
“혁신은 환자에게 닿아야”…약가·급여가 접근성 좌우
다만 뛰어난 연구·생산 역량만으로 글로벌 전략시장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발된 신약이 실제 환자에게 전달되려면 허가 이후 약가와 건강보험 급여 등 접근성 문제까지 함께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디거 대표는 “혁신의 가치와 가격은 특정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여러 시장에서 중요한 논의 주제”라며 “정부가 혁신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이를 얼마나 신속하게 보건의료 체계에 반영할지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혁신형·준혁신형 제약기업 평가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글로벌 제약사의 기여도를 판단할 때 단순 매출이나 연구소 보유 여부만 볼 것이 아니라 임상시험 투자, 생산시설 활용, 기술 협력, 전문인력 육성 등 다양한 기여를 폭넓게 살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백신보다 중요한 것은 접종”…초고령사회가 바꾼 시장
리디거 대표가 바라본 한국 시장의 또 다른 특징은 빠른 인구 고령화다.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고령 인구가 늘면서 암과 만성질환의 치료 수요뿐 아니라 감염병을 예방하고 입원 위험을 낮추는 보건의료 전략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그는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백신이 아니라 ‘백신접종’”이라며 “혁신과 기술이 실제로 필요한 환자와 인구집단에게 도달해야 하며, 그것이 백신접종이 하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백신을 개발하고 허가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사회적 효과를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다. 접종 대상과 지원 범위를 정하고 의료기관을 통해 실제 고령층에게 전달돼야 입원과 치료 수요, 가족의 간병 부담을 줄이는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백신을 주로 영유아에게 필요한 의약품으로 보는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상포진이나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 감염처럼 고령층에서 중증으로 진행할 위험이 큰 질환이 늘면서 성인 예방접종은 초고령사회의 의료비와 병상 부담을 낮출 수 있는 정책 수단으로 중요해지고 있다.
리디거 대표는 “많은 보건의료 시스템이 예방에 투자하기보다 질환이 발생한 뒤 치료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예방접종의 가치는 감염병 예방에만 국한하지 말고 입원과 병상 이용 감소, 치료 부담 완화, 삶의 질 향상까지 포함해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남미와 비교하면 한국은 새로운 백신과 치료 기술을 도입할 경제력과 의료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반면 고령화 속도가 빠른 만큼 성인과 고령층을 위한 예방정책을 더 서둘러 마련해야 하는 시장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과 같은 고소득 국가는 혁신에 투자하고 그 가치를 인정할 여건을 갖추고 있다”며 “앞으로는 소아·청소년 예방접종을 넘어 고령층을 포함한 다양한 연령과 인구집단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GSK는 지난 40년간 한국에서 호흡기질환과 백신, HIV 치료제를 중심으로 입지를 다져왔다. 최근에는 부인암을 비롯한 고형암과 골수섬유증·다발골수종 등 혈액암, 면역질환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예방부터 만성질환 관리, 고난도 암 치료까지 환자의 생애와 질환 단계에 맞는 치료·예방 옵션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이다.
리디거 대표는 한국GSK가 앞으로 어떤 기업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지난 40년간 한국에 혁신을 소개하고 보건의료 시스템의 발전에 기여한 기업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며 “앞으로도 새로운 치료와 예방 옵션을 꾸준히 선보이고, 환자들이 이러한 혁신에 보다 원활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의료계와 정책 당국을 비롯한 여러 이해관계자와 협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