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7월 23일 (목)

‘축구’만 있는 게 아니다…이 도시가 삶을 위로하는 방식

[세계를 걷다, 웰빙을 만나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축구’만 있는 게 아니다…이 도시가 삶을 위로하는 방식
마요광장 인근의 한 빌딩 외벽에 붙여진 메시 얼굴 광고. 사진=김승근 기자

(편집자 주)

여행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때로는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들어가 팍팍한 일상에 숨통을 틔우고,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가장 적극적인 ‘웰빙’의 여정이 되기도 합니다.

코메디닷컴이 새롭게 선보이는 ‘세계를 걷다, 웰빙을 만나다’​는 세계 곳곳의 삶의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각 나라와 도시가 품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곳 사람들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함께 전하고자 합니다.

사계절이 하루에 펼쳐지는 땅, 망설임 없이 추천하는 아르헨티나

여행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이 묻는다.

어느 나라가 제일 좋았느냐, 어느 나라를 추천하고 싶냐, 다시 가고 싶은 나라는 어디냐 등등.

그때 망설이지 않고 답하는 나라가 아르헨티나다. 어느 누가 가봐도 ‘아, 좋다’라는 대답이 절반을 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단은 1년 365일 어느 날에 도착해도 아르헨티나에는 4계절이 다 있다.

북쪽 이과수 폭포 쪽은 여름, 남쪽 모레노 빙하 쪽에선 겨울이 공존한다. 면적도 넓어서 세계 8위를 차지한다. 남한의 28배 정도다.

하지만 풍부한 자연과 곳곳에 널린 아름다운 풍광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게 아쉬운 나라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 이과수폭포의 하이라이트인 ‘악마의 목구멍(Garganta del Diablo)’. 사진=김승근 기자

불안한 현실 속, 삶을 치유하는 정신적 신앙 ‘축구’

포퓰리즘으로 그 이미지가 추락한 나라의 대표 주자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

20세기 초반 세계 4대 부국이라는 화려했던 영광이 있었던 곳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나라가 문자 그대로 ‘언스테이블(unstable)’하다.

그래서일까. 최소한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갈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인사를 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어져 가는 걸 절감한다.

현지에 사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제는 좋아지겠지, 이번 정권은 다르겠지’ 하다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웃을 일이 줄어든 게 표정으로 나타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올해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얼굴에 두어 달 정도 화색이 돌았다. 바로 축구 때문이다. 물론 북중미 월드컵에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말이다.

마라도나와 메시로 이어지는 아르헨티나의 축구는 이들에게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선 ‘신앙’이자 강력한 정신 건강의 버팀목이다.

온 국민이 함께 소리 높여 응원하고 감정을 분출하는 축구 문화는, 최소한 아르헨티나에 있어서만큼은 현대 의학이 말하는 스트레스 해소와 집단적 연대감을 통한 우울증 예방에 최고의 처방전이 되어주고 있는 셈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상공에서 본 팜파. 사진=김승근 기자

팍팍한 삶의 그늘과 역사적 상흔, 그럼에도 여행자의 환대

그러나 축구가 모든 걸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일단 살아가자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환율 변화가 천당과 지옥을 너무나 자주, 그리고 빨리 왔다 갔다 한다는 점은 그 나라의 치명적 약점임이 분명하다.

대개의 남미 국가처럼 미국 달러의 위세는 대단하고, 그중에서도 100달러짜리 신권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특우대를 받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은행보다 민간 환전소(Cambio)에서 환율을 더 잘 쳐줬다.

하지만 2023년 밀레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이런 비정상적인 환율 구조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차관 도입과 외환 규제 완화, 공식 환율 현실화 과정에서 페소화 가치가 크게 평가절하됐다.

문제는 수입품 가격이 뛰면서 밀레이 정부가 가까스로 잡아가던 인플레이션을 다시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6년 현재, 원자재 가격과 소비자가격 급등에 주택 임대료까지 폭등해 서민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결국 이 고단함이 현지인들의 얼굴 표정에 그대로 묻어나는 것이다.

1964년부터 10년간 신문에 연재됐던 시사 만화 '마팔다' 캐릭터와 사진을 찍는 시민들. 수십년이 지났지만 마팔다의 인기는 여전해 아직도 캐릭터 상품은 도심 곳곳에서 판매된다. 사진=김승근 기자

1985년 아르헨티나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오피셜 스토리(The Official Story)’나 영화 ‘아르헨티나, 1985’가 다룬 소위 ‘더러운 전쟁’(1976~1983년 군부독재 시절 자행된 강제 실종과 국가폭력)의 상흔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도 사회적 ‘어두움’에 한몫하고 있다.

이런 현실적 배경들을 모르면 여타 남미 국가와 달리 호텔에서조차 인사가 인색한 데 대해 여행객 입장에선 오해하기 쉽다. 게다가 인구의 절대다수가 백인이라는 데서 기인한 인종차별적 시선이 의외로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물론 터 잡고 살지 않는 여행객의 입장이라면,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차별과 환대의 이면으로 넘길 수밖에 없다.

답답한 빌딩 숲, 그 너머의 숨통을 찾아서

제목이 너무 길어 읽다가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이 영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두서없는 건축물들이 사랑을 가로막는 요인이라며 도시계획(?)에 대한 화풀이로 시작한다.

창을 열면 바로 앞 건물의 벽면이 보이고, 디지털 환경 위주로 업무가 이뤄지다 보니 기술의 발달이 도리어 인간적인 접촉을 힘들게 만든 세태를 꼬집는다.

물론 수많은 빌딩이 제멋대로 솟아 있고 스카이라인이 단정하지 않은 도시가 부에노스아이레스만은 아니다. 오히려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도면 사랑을 가로막을 정도로 답답한 빌딩 숲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4성급 체인 호텔도 겉모습과 달리 수압이 낮거나 온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곳이 많은 건 함정이다.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해 호텔로 쓰다 보니 배수관 교체에 한계가 있어 구도심을 중심으로는 샤워가 그리 편하지 않다.

1936년 도시 건립 400주년을 기념해 만든 67.5m의 오벨리스크. 7월 9일대로와 코리엔테스대로가 교차하는 공화국광장에 위치해 있다. 사진=김승근 기자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넓은 대로인 폭 140m의 ‘7월 9일 대로’가 빌딩 숲 사이로 시야를 시원하게 트여준다. 도심 중심이자 아르헨티나 독립을 선언한 마요 광장, 그리고 곳곳에 자리 잡은 도심 공원도 고마운 존재다.

그중 압권은 1990년대까지 버려졌던 푸에르토 마데로 지구다. 이제는 화려하게 변모한 수변을 따라 독특한 마천루들이 들어서 여행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여기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입성을 위해 이용하는 호르헤 뉴베리 공항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라플라타강의 압도적인 강폭은 도시 전체에 푸르름을 더한다.

100% 완벽한 해방감은 아닐지라도 여행객을 위한 돌파구는 충분하다. 빌딩 숲을 뚫고 달리는 자전거 투어가 대표적이다. 도시 전체가 평평해 페달을 밟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다는 점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숨은 매력이다.

푸에르토 마데로의 명물로 탱고를 추는 남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여인의 다리. 대형 선박이 지나갈 때마다 90도 회전하며 열리는 독특한 구조를 자랑한다. 사진=김승근 기자

아사도, 마테차, 말벡 와인이 만드는 건강한 웰빙의 마법

저녁엔 할 게 더 많아진다.

탱고 레슨, 아사도(아르헨티나식 숯불 바베큐) 맛보기, 팔레르모의 길거리 맛집 탐방 등등.

아르헨티나인들이 매일같이 거대한 소고기 요리인 ‘아사도’를 즐기면서도 심혈관 질환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이들의 소울 푸드인 ‘마테차’와 ‘말벡 와인’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 어디서나 무거운 물통을 들고 다니며 특유의 컵에 마테차를 부어 마시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마테차는 ‘마시는 샐러드’라 불릴 만큼 사포닌과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해 기름진 고기의 지방 분해를 돕고 면역력을 높여준다.

여기에 안데스산맥 고산지대에서 자란 말벡(Malbec) 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은 항산화 성분인 ‘레스베라트롤’과 ‘폴리페놀’ 함량이 매우 높아 혈관 건강을 돕는 천연 영양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중심지인 코르도바거리 버스정류소 앞에 세워진 마테찻잔 형태의 쓰레기통. 사진=김승근 기자

2010년 마테차를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난다. 페루 티티카카 여행 중 같은 보트에 탔던 아르헨티나 소녀가 내게 찻잔을 건넸다. 16살 성인이 된 기념으로 부모님이 페루 여행을 보내줬다는 그 여학생이 준 마테차를 받아 들고 잠시 망설였다.

남이 먹던 금속 빨대(봄비야·Bombilla)를 닦아서 먹어야 하나 그냥 먹어야 하나 고민도 잠시, 그냥 입에 대고 마셨다. 그제야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테차는 하나의 컵으로 돌려가며 마시는 문화가 있어, 상대가 주는 차를 거절하지 않고 마셔야 비로소 진정한 ‘친구’로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처럼 마테차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타인과 온기를 나누고 관계를 치유하는 마음의 웰빙이기도 한 셈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에 등장하는 바수르(Bar sur). 저녁에만 탱고쇼를 선보인다. 사진=김승근 기자

옛 기억과 와인 향이 공존하는 산텔모 그리고 엘 아테네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 투게더’에 나왔던 ‘바 수르(Bar Sur)’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다. 산텔모라는 지역으로, 이전에는 골동품 가게들이 즐비했고 주말이면 벼룩시장으로 북적이던 곳이다.

최근 이 유서 깊은 산텔모 지역은 휴일마다 와인을 든 시민들로 북적거리는 새로운 핫플레이스가 되고 있다. 단돈 몇 페소로 지인이나 연인과 대화를 나누며 길가에 앉거나 서서 몇 시간씩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이채롭다.

주말이면 산텔모 거리 곳곳은 와인잔을 든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들로 넘쳐난다. 자유분방한 그들 삶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다. 사진=김승근 기자

낡은 골목마다 아르헨티나 전역의 말벡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보데가(Bodega·와인 저장고)와 바(Bar)들이 들어서며, 과거의 빛바랜 낭만에 현대적인 웰빙 미식의 활력을 더하고 있다.

산텔모의 남쪽은 라보카 지역이다.

유럽 이주민들의 애환이 담긴 항구이자 탱고의 발상지, 그리고 마라도나의 고향이다. 형형색색 건물의 항구 마을 라보카는 그 애환의 역사가 이젠 매일 알록달록한 축제의 거리로 바뀌었다. 사실 라보카의 건물들은 100년 전 부두 노동자들이 임금 대신 지급받거나 사용하던 색색의 식권의 색깔을 나타낸 고단한 역사의 아이콘인 것이다.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의 자랑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상점 2층에 만들어 놓은 라보카의 한 건물. 사진=김승근 기자

도심 북쪽은 치안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레콜레타 지역이다. 에비타를 비롯해 유명 인사들이 묻힌 공동묘지 ‘라 레콜레타’가 있다. 공동묘지 인근 지역의 땅값이 비싸다는 게 우리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에게 이곳은 역사적 기념비이자 문화적 자부심이다.

라 레콜레타에서 남쪽으로 20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중 하나인 ‘엘 아테네오’가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호그와트마법학교 모델로 알려진 포르투갈 포르투의 렐루 서점과 쌍벽을 이루는데, 규모 면에서는 엘 아테네오가 압도적이다.

입장료를 받는 렐루 서점과 달리, 이곳은 1919년에 문을 연 화려한 극장(Teatro Gran Splendid)을 개조해 웅장한 무대와 발코니석을 무료로 조용히 거닐 수 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Casa Rosad) 분홍색 집이란 의미다. 마요광장(Plaza de Mayo, 5월 광장) 동쪽에 위치한 대통령 공식 집무실이자 국가 사적지. 사진=김승근 기자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나라일지는 모르지만,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국민적 저력이 삶을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이라는 걸 엘 아테네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느낄 수 있다.

불안정한 삶 속에서도 축구로 영혼을 달래고, 마테차를 나누며 온기를 공유하고, 붉은 와인 한 잔에 시름을 녹여내는 곳.

빌딩 숲의 답답함을 넘어 인간이 삶을 어떻게 위로하고 치유(Well-being)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는 도시,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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