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는 여름철에 갑자기 입맛이 떨어져 식욕을 잃고, 힘이 없어 쉽게 피곤해지면 어른들은 이런 증상을 “더위 먹었다”고 표현했다. 그럴 땐 각종 보양식이나 익모초를 짠 즙을 먹게 했다. “더위 먹었을 땐, 익모초”라는 말도 생겼다. 익모초는 ‘어머니에게 이로운 풀’이라는 뜻이다. 여성의 건강과 뭉친 피를 풀어준다는 약용 식물이다. 몸 안의 과도한 열을 내리고 더위 먹었을 때의 식욕 부진과 피로 해소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화 기능이 약한 사람이 과다 복용하면 복통이나 설사를 일으킬 수 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억지로 쓴 맛을 찾아 먹는 것보다 몸의 열을 다스리는 냉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음식을 봐도 식욕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는 단순히 입맛이 까다로워져서가 아니다. 더위를 타는 증상은 우리 몸이 과열을 막고 정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영국 브리스틀대 심리학·신경과학부 단 바움가르트 박사는 여름철 폭염이 인간의 위장관계와 신진대사에 미치는 영향과 식욕 저하의 과학적 원인을 상세히 설명했다. 호주 비영리 매체 ‘더 컨버세이션’에 쓴 칼럼을 통해서다. 바움가르트 박사는 “우리 몸은 평균 37°C의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신진대사와 다양한 생리적 기능이 올바르게 작동한다”고 말했다.
이 체온 조절을 맡는 핵심 센터가 뇌의 시상하부다. 만약 내부 체온이 너무 낮아지거나 높아지면 체내 효소의 활성과 생화학적 반응이 끊어지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체온 조절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다.
체온에는 감염, 운동, 호르몬, 알코올 등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치지만, 주변 환경의 기온도 매우 중요하다. 더운 날씨에 노출되면 몸은 체온 상승을 막기 위해 땀을 흘리거나 피부의 털을 눕혀 열 보유를 줄이는 등 각종 냉각 메커니즘을 가동한다. 특히 혈액의 흐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몸을 식혀야 할 때가 되면, 혈액은 열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피부 표면 쪽으로 많이 몰린다. 이 과정에서 위장관 등 다른 장기로 가는 혈류량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음식을 섭취하면 소화, 흡수, 영양소 이동을 위해 피가 장으로 많이 흘러가야 한다. 하지만 폭염 속에서는 몸이 열을 ‘보존’하는 대신 ‘방출’하는 데 집중한다. 영양소의 흡수와 저장 등 소화 과정 자체가 에너지를 소비하고 열을 발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은 소화 과정을 억제하기 위해 장으로 가는 혈류를 줄이며, 이 때문에 여름철 식욕이 뚝 떨어지곤 한다.
식욕은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그렐린과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렙틴, 펩타이드YY(PYY),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등의 균형에 의해 조절된다. 일부 연구 결과를 보면 열에 노출될 때 배고픔 호르몬은 줄고, 포만감 호르몬은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식욕이 떨어지는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시상하부가 관장하는 배고픔과 갈증의 신호 중첩도 눈여겨봐야 한다. 체온이 올라가면 몸은 냉각을 위해 땀을 흘리고, 이로 인해 수분이 손실되면서 혈류 내 미네랄 수치가 변한다. 이때 뇌는 탈수를 막기 위해 강한 갈증 신호를 보내며, 음식을 먹는 것보다 수분을 섭취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그렇다고 물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마시면 위가 팽창해 식욕이 더 떨어질 수 있다. 또한 열 스트레스는 위장의 운동을 둔화시켜 음식을 더 천천히 비워내게 만든다. 음식이 위에 오래 머물면서 장은 뇌로 포만감 신호를 계속 보내고, 이로 인해 더부룩함이나 배부른 느낌이 더 오래 지속된다.
◇ 무더위 속, 현명한 영양 섭취 방법= 폭염 속에서 몸의 최우선 순위는 소화가 아니라 체온을 낮추는 것이다. 여름철에는 소화 과정에서 대사 열을 많이 발생시키는 고단백, 고탄수화물 음식보다는 수분이 풍부하고 시원한 과일 샐러드 채소와 우유 요거트 등 가벼운 유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식욕이 좀 떨어졌더라도,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수분과 전해질을 충분히 섭취하고, 과도한 신체 활동을 피하고, 얇고 헐렁한 옷을 입어 몸을 시원하게 유지하면 식욕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 음식을 먹을 때는 한 번에 많이 먹기보다, 영양가 높고 수분과 전해질이 풍부한 음식을 조금씩 자주 나눠 먹는 것이 효과적이다.
단백질도 하루 동안 조금씩 여러 차례 섭취하면 체온 상승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 견과류, 유제품, 채소, 콩류, 아보카도, 올리브, 곡물처럼 지중해식 식단에 쓰이고 영양 밀도가 높은 식품은 높은 기온 속에서 식욕이 떨어졌을 때 균형 잡힌 영양을 공급하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여름에 입맛이 없을 때 찬물에 밥을 말아 장아찌나 젓갈과 먹으면 식욕을 돋우는 데 도움이 되나요?
A1. 당장 입맛을 돌게 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더위 때문에 위장 기능이 이미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찬물과 나트륨 함량이 높은 짠 음식을 섭취하면 위장 운동을 더 방해하고 소화 불량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수분 보충을 원한다면 맹물보다는, 수분과 전해질이 풍부한 수박 오이 샐러드 채소 등을 신선하게 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Q2. 날씨가 더울 때 삼계탕이나 장어 같은 뜨거운 보양식을 먹는 ‘이열치열’은 과학적 근거가 있나요?
A2. 과학적인 근거는 있지만 주의해야 할 점도 있습니다. 더운 날씨에는 혈액이 피부 표면으로 몰려 위장관 내부가 상대적으로 차가워집니다. 이때 따뜻한 음식을 먹으면 위장관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소화 가동력을 일시적으로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단백질과 지방 함량이 너무 높은 고칼로리 음식은 소화 과정에서 더 많은 대사 열을 발생시켜 몸을 더 쉽게 지치게 할 수 있습니다. 식욕이 뚝 떨어졌을 때는 한 번에 많이 먹기보다 소량씩 나눠 먹는 것이 현명합니다.
Q3.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렸을 때 식욕 저하를 막으려면 스포츠음료를 마시는 게 좋을까요?
A3. 가벼운 일상생활에서는 맹물을 마시고, 수분이 많은 과일 채소를 섭취하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야외 활동으로 땀을 너무 많이 흘렸을 때는 전해질과 수분을 빠르게 보충할 수 있는 스포츠음료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몸속 미네랄과 수분 균형이 깨지면 뇌의 시상하부가 강한 갈증 신호만을 보내 식욕을 완전히 억제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판 스포츠음료 중에는 당분이 과도하게 많은 제품이 있으니 성분을 확인하고 마시거나, 물에 레몬이나 소금을 살짝 타서 마시는 것도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