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오전 7시. 대부분 아침잠을 자며 주말을 즐기는 시간에 4000여 명이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에 모였다.
남녀노소 주황색 티를 맞춰 입고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던 마라톤과는 뭔가 다르다. 진한 색 선글라스를 쓰고 옆사람 손을 잡고 걷거나 달린다.
몇몇은 전력질주로 그들을 앞서나가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사고 위험이 있습니다! 좀 비켜주세요! 옆으로 좀 지나갈게요! 위험하니 옆으로 밀착해주세요!”
무엇이 이들을 소리지르며 달리게 했을까.
시각장애인 같이 뛰는데, 느린 사람들 먼저 출발?
올해로 12회째를 맞은 어울림마라톤은 시각장애인 러너와 비장애인 러너가 함께 달리는 대회다. 후원금과 참가비는 시각장애인 이동권 개선과 스포츠 활동 지원기금에 전액 사용된다.
이날 오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어울림마라톤’ 현장 분위기를 설명하는 게시글이 업로드됐다.
게시물 작성자는 현장에서 대회에 참가한 스트리머 A씨의 생방송 화면 클립을 공유했다. A씨의 방송 화면 영상에선 대회 코스 한쪽으로 한가하게 걷는 사람들과, 왼쪽으로 빠르게 뛰는 사람들이 함께 보인다.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A씨를 비롯한 러너들은 “왼쪽으로 지나갈게요”, “오른쪽으로 밀착해주세요” 등을 계속 외쳤다.
작성자는 “걷기 부문에 지원한 참가자들을 먼저 출발시키는 바람에 뒤이어 출발한 5km, 10km, 하프 마라톤(21km) 참가자들과 상당한 혼선이 생겼다”고 비판했다.
안 그래도 좁은 길에 안전요원도 딱히 안 보인다.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참가자들이 많은 상황에서, 안전 사고 위험이 매우 높은 상황이라는 것이 작성자의 주장이다.
마라톤 대회, 통상적으론 러너 그룹 먼저 출발
대부분의 마라톤 대회는 기록 측정을 우선시하는 ‘러너 그룹’과 참가 자체에 의의를 두는 ‘일반 참가자 그룹’이 함께 신청한다.
이에 통상 대회 주최 측은 그룹별로 출발 시간을 다르게 설정한다. 뛰는 속도가 다른 수천명의 참가자가 한꺼번에 출발 지점에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대규모 대회에서는 참가자가 출발선을 통과하는 데만 몇 분 넘게 걸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출발 과정에서 시간차를 두면 기록 측정이 상대적으로 공정해진다는 장점도 있다.
앞서 조 씨의 방송화면을 본 시청자와 누리꾼들은 이번 어울림마라톤에서 이같은 ‘상식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 봤다. 이에 “세상에 걷기 부문을 먼저 출발시키는 마라톤이 있나”, “장거리나 고난이도 코스 참가자를 먼저 보내는 게 기본”, “운영이 위험한 마라톤 대회가 너무 많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다만 주최 측에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주최측 “더 큰 혼란 막기 위한 조치”
대회를 주관한 서울시각장애인스포츠연맹 사무국 관계자는 코메디닷컴에 “안전사고와 병목현상을 막기 위해 그룹별로 코스를 나누면서 생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어울림마라톤 참가 그룹은 5km(기록 미측정)과 러너들이 참가하는 10km·하프 마라톤으로 나뉜다. 앞선 게시물에서 ‘걷기 부문’이라고 표현한 그룹은 실제 5km 코스에 해당한다.

모든 참가자는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 평화광장에서 서울에너지드림센터로 출발한다. 이후 5km 그룹은 월드컵육교를 건너 하늘공원 방향으로 간다. 10km 그룹은 육교를 건넌 뒤 쭉 늘어선 메타세콰이어길을 뛴다.
하프마라톤 그룹은 에너지드림센터를 지나, 연결브릿지를 통해 난지한강공원을 향한다. 약 530m 남짓한 코스 극초반 구간(평화광장~에너지드림센터)을 제외하면 그룹별로 크게 겹치지 않는다.

관계자는 “코스를 나눠 놓았기 때문에, 통상 다른 대회들처럼 출발에 시차를 두면 오히려 반환점을 돌고 나서 극심한 병목현상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하프 마라톤을 뛰는 전문 러너들은 반환점을 돈 후 하늘공원과 월드컵육교를 거쳐 평화광장에 도착하게 된다. 이는 5km 그룹의 초반 코스에 해당하는데, 속도가 빠른 러너 그룹을 먼저 출발시키면 이후 그룹의 출발에 지장이 생긴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극초반 구간에서 일부 혼선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상적으로 시차를 두고 출발하면 오히려 출발 부분에서 러너들과 5km 참가자들이 뛰는 방향이 달라 더 큰 혼란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관계자는 시각장애인들의 안전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어울림마라톤에서는 시각장애인 참가자에게 보조 러너나 가이드를 일대일로 동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참가자 폭발적으로 늘며 일부 구간서 혼선
사무국에 따르면 이번 대회는 평년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직전 대회(2025년, 11회)에 2200여 명이 참가했던 것에 비해 올해 3800~4000명이 참가한 것으로 사무국은 추산하고 있다. 최대 두 배 가량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뛰었다.
사무국에서 비장애인 러너와 장애인 러너의 참가비율을 별도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정황상 이번 어울림마라톤 참가자가 폭증한 배경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
6월 한 달 동안 전국에서 약 60여 차례의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지난 주말(13~14일)에만 17개 대회가 진행됐다. 이처럼 많은 대회가 열리는데도 러닝계는 이미 마라톤 대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지 오래다.
높은 인기에 참가 접수자가 몰리는 대형 대회들은 추첨제 신청 방식을 도입하기까지 했다. 기록을 기준으로 그룹을 나눠 응모에 당첨된 참가자만 최종 접수가 가능한 형태다.
총 1만5000명 이상이 참가하는 초대형 마라톤 대회의 현장진행 요원으로 일했던 민준성(32·가명)씨는 “접수를 못해 뛸 곳이 없어진 러너들이 중소 규모 대회로 쏠리는 현상이 흔해졌다. 추첨에 떨어지거나 선착순에 밀리면 꼼짝없이 다른 대회를 찾아봐야 한다. 참가하는 대회마다 인파를 감당하지 못해 말썽이다”라고 말했다.
민 씨도 어울림마라톤 참가는 올해가 처음이다.
전년까지 어울림마라톤은 코스를 분리하는 조치만으로도 큰 혼란 없이 진행됐다. 이번에는 인파가 몰린 탓에 사무국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겼다.
현장에서 가이드와 러너들이 유동적으로 대처한 덕에, 다행히 큰 안전사고가 발생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무국 관계자는 “행사 자체가 월드컵공원 안에서 이뤄지다 보니 그룹별로 코스를 완전히 분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룹별 코스를 조금 조정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는데, 이번에 혼란이 있었던 만큼 다음 대회부터는 완전히 코스를 나누는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민 씨는 “참가비를 지불하는 정식 대회에서 출발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면 이는 주최 측의 판단 미스”라면서도 “장애인들을 위한 러닝 무대가 충분하지 않은 현실에서, 타 대회와 다른 상황이 발생했다고 주최 측이 비판받는 것은 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