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7월 21일 (화)

삶의 끝, 용기 내어 부르는 이름 ‘가족’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 5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아, 글쎄 연락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깐요.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혼자 죽게 해줘요.”

그는 우리 병동에 처음 입원했을 때부터 거칠게 말했다. 환자 정보란에는 ‘보호자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황달이 심해 눈이 노랗고 얼굴과 몸이 검푸른 빛을 띤 이 70대 환자는 담관암이 폐와 간, 뼈까지 전이되어 항암치료도 하기 힘든 상태였다. 종양으로 막혀가는 담관을 뚫고 스텐트를 넣는 시술을 하자 황달은 조금 나아지는 듯 했지만 숨이 점점 가빠져 콧줄로 산소에 의존해야 했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그의 상태를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와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익숙해졌을 때, 그의 침대에 걸터앉아 어렵게 운을 떼었다.

“누구나 마지막 순간은 오기 마련이지요. 저도, 환자분도 언젠가는 반드시 겪게 되는 일이예요. 그런데 환자분은 지금 병이 많이 진행되어 갑자기 위독해지실 수 있어요.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해드리면 좋을까요? 인공호흡기나 심장마사지 같은 연명 치료라는 말은 들어보셨나요?”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굴에는 후회와 서글픔이 교차했다. 그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평생 함부로 살면서 가족들을 힘들게만 했는데 무슨 염치로 더 살고 싶다고 하겠어요. 자연스럽게 그냥… 떠나고 싶어요.”

그에겐 가족이 있었던 것이었다. 변변한 직업 없이 건설일용직으로 일하다가 사는 게 힘들어 술에 빠져 살았다고 했다. 그를 원망하는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아들과 딸이 있었지만, 40대에 이혼한 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더 늦기 전에 만나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래도 아버지가 이제 세상에 안 계실 수도 있다는 걸 자녀분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면목이 없어서요. 연락처도 모르고요. 그래도 만날 수 있다면….”

그가 살던 동네 동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했다. 요즘 워낙 행정이 잘 돼있어 그런지 며칠 후 아들과 딸이 인천에 살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동사무소 직원이 우선 아들에게 연락해 간단한 설명을 하고 동의를 얻은 뒤 아들 전화번호를 알려왔다.

나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환자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며 임종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늘 가족을 그리워했지만 미안한 마음 때문에 자식들을 찾지 못했다는 말도 전했다. 아들은 아무 대답 없이 듣고만 있었다.

다음날 아들과 딸, 전 부인까지 찾아왔다. 그들은 환자와 오랫동안 손을 붙잡고 눈물만 흘렸다. 원망이나 미움보다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병실 안에 가득했다. 며칠 후 환자는 평생의 짐을 내려놓은 듯 편안한 표정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종양내과 병동에서 환자를 돌보면서 난 가장 먼저 가족관계를 확인한다. 누구와 환자 상태를 상의할 것인지, 환자는 마지막 순간에 누가 곁에 있길 원하는지 미리 알아두기 위해서다.

하지만 요즘은 가족과 단절된 독거 환자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아무도 연락이 닿지 않는 무연고 환자도 적지 않다. 특히 내가 일하는 강원도 지역에는 그런 분들이 많다.

이들은 늙고 병들어서야 가족을 찾는 것이 염치가 없다며, 차라리 혼자 외롭게 그 길을 가겠다고 한다. 특히 형편이 어려운 분들일수록 그렇다. 자기가 짊어질 경제적 부담을 이제 와서 가족에게 떠넘길 수 없다는 생각도 있으리라.

그런 분들에게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용기 내어 ‘가족’이라는 그리운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돕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하지만 모든 환자가 드라마처럼 해피엔딩이 되지는 못한다.

70대 여자 폐암 환자도 그랬다. 친척도 없고 오빠 한 분 계셨다는데 오래전에 사망해 읍사무소 직원이 가족을 대신해 생활을 돕고 있는 독거노인이다.

항암치료 중이긴 하지만 암이 양쪽 폐에 번져 입원을 거듭할 때마다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침대 위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은 40년 전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애들 둘을 시댁에 두고 나왔어. 경상도 종가집이었는데 시댁에 들어와 살지 않으면 애들을 못 만나게 한다고 했어. 하지만 어찌나 시집살이가 혹독했던지, 눈물 마를 날이 없었지. 막내가 여덟 살 때 강원도 친정으로 돌아왔어.”

자식들이 대학도 졸업하고 결혼도 하고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은 먼 지인을 통해 간간이 들었지만,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자식을 버리고 간 비정한 엄마였기 때문이다.

“좀 알아봐 드릴까요? 자제분 연락처 알게 되면 제가 말씀드려볼게요.”
“시댁에서 나를 나쁜 년이라고 계속 욕했을 텐데 애들이 만나줄까? 그래도 만날 수만 있다면 좋겠어.”

읍사무소에 환자가 가족을 찾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번 이야기는 기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읍사무소 직원이 아들과 딸을 찾아 연락했지만, 만나지 않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엄마나 의료진에게 전화번호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한다. 40년을 그리워하며 원망했을 엄마가 큰 병에 걸리고 나서야 보고 싶어 한다니, 지금의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럴 줄 알았어. 차라리 찾지 말걸. 애들한테 끝까지 용서받지 못하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

그래도 엄마 상태를 알려두었으니 혹시 마음이 바뀌면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위로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는 항암치료도 어려운 상태가 되어 결국 호스피스 치료를 위해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그 후 그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나중에라도 자식들이 그를 찾아와 주었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한 가지는 믿고 싶었다.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줄 알았던 엄마가 사실은 평생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그 절절한 마음만큼은 언젠가 자식들에게 닿아 차갑게 얼어붙었던 가슴을 녹여주게 되었기를.

이영이 교수 대한입원의학회 홍보위원장(강릉아산병원 내과 진료교수)

<편집자주>입원전담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는 병동에 상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말한다. 2016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입원전담의 제도는 2021년 본사업으로 전환되어 올해 꼭 10년을 맞는다.'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는 이들이 병동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고 퇴원시키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작은 순간들의 기록이다. 환자와 보호자, 다른 의료진, 그리고 입원전담의 자신에 대한 고백까지, 이 연재(주1회)를 통해 병원 안에서 겪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입원의학회 도움.

댓글 1
댓글 쓰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