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혈압은 혈압이 오르기 전부터 뇌 기능에 손상을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혈압약으로 수치를 정상 범위에 유지한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동안 고혈압 환자들은 혈압 조절 상태와 무관하게 인지 기능 저하 위험이 일반인보다 1.2~1.5배 높은 것으로 보고돼 왔으나, 뚜렷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 코넬대 와일코넬의대 코스탄티노 이아데콜라 교수 연구팀은 국제 학술지 《뉴런(Neuron)》에 발표한 최신 연구에서 고혈압을 유발하는 호르몬 ‘안지오텐신Ⅱ’를 투여한 실험용 생쥐에서 혈압이 상승하기도 전인 투여 3일째부터 뇌세포의 유전자 발현 변화가 시작됐다고 밝혔다.
뇌의 핵심 세포인 ▲혈관내피세포 ▲중간 뉴런 ▲희소돌기아교세포(oligodendrocyte)에서 동시에 변화가 관찰된 것이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것은 혈관의 가장 안쪽을 이루는 내피세포였다. 이 세포들은 혈압이 높아지기도 전에 에너지 대사 능력이 떨어지고 노화 지표가 증가하는 ‘조기 노화’ 현상을 보였으며, 뇌로 영양을 공급하고 독성 물질 유입을 막는 뇌혈관장벽(BBB)의 약화 조짐도 나타났다.
뇌의 흥분·억제 신호 균형을 조절하는 중간 뉴런 역시 손상돼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에서 나타나는 것과 유사한 신호 불균형이 확인됐다. 신경섬유를 감싸 보호하는 미엘린(myelin)을 만드는 희소돌기아교세포에서는 미엘린 형성과 유지에 필요한 유전자가 제대로 발현되지 않아 신경세포 간 정보 전달 능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연구팀은 안지오텐신Ⅱ 투여 후 42일까지 뇌 변화를 추적한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유전자 변화는 더욱 광범위해지고 인지기능 저하, 미엘린 손상, 신경세포 미토콘드리아 기능 장애 등이 동반됐다고 설명했다.
이아데콜라 교수는 “고혈압을 유발한 뒤 불과 3일, 즉 혈압이 실제로 오르기 전부터 인지장애와 관련된 핵심 세포들이 이미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라며 “결국 혈압 상승 자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또 다른 요인이 뇌 손상에 관여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다만 희망적인 소식도 있다. 연구팀은 추가 실험에서 널리 사용되는 고혈압 치료제인 안지오텐신 수용체 차단제(ARB), 특히 로사르탄 계열 약물이 이러한 초기 뇌 손상을 상당 부분 되돌리는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는 ARB 계열 약물이 다른 혈압약보다 인지기능 보호에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기존 임상 연구들을 뒷받침하는 결과다.
연구를 주도한 앤서니 파콜코 박사후 연구원은 “고혈압으로 인해 이렇게 이른 시점부터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결과”라며 “질병 초기 단계에서 고혈압이 세포·분자 수준에서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것은 인지 기능 저하를 차단할 수 있는 새로운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아데콜라 교수는 “고혈압은 심장과 신장 손상의 주요 원인이지만 항고혈압제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며 “인지 기능과는 별개로, 고혈압 치료 자체가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고혈압이 어떤 과정을 통해 뇌세포 손상으로 이어지는지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 작동 원리를 밝힘으로써, 향후 고혈압으로 인한 인지기능 저하를 예방하거나 되돌릴 수 있는 효과적인 치료 전략 개발로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