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 글로벌기업의 직원 교육용 ‘리더십 매뉴얼’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업무에 불성실한 부하 직원을 나무랄 수 있다. 다만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1대1로 꾸짖는 게 좋다” 직장인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놓고 야단을 맞으면 후유증이 크다. 반성의 마음보다는 반발 심리가 더 커질 수 있다.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몰래 켜놓고 공개 시기를 고민할 수도 있다. 예전에 한 대기업 오너가 직원에게 폭언하는 녹음이 공개되어 법정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일제 시대부터 내려온 폭언 문화 여전한 곳…일부 병원의 문제일까?
엄정한 군기가 생명인 군에서도 폭언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예전에 구타까지 있던 시절 군 복무를 했던 사람은 격세지감을 느낄만하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은 오래지 않은 동안에 몰라보게 변하여 아주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내려온 폭언 문화가 아직도 여전한 곳이 있다. 바로 일부의 병원이다. 모든 병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간호사 절반 이상이 폭언, 괴롭힘 등 인권침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군에서도 크게 줄어든 폭언과 괴롭힘이 환자들이 많은 병원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대한간호협회가 전국 의료기관 간호사 788명(여성 90.4%, 주로 30~40대)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권 실태조사 결과, 응답자의 50.8%가 최근 1년 사이 인권침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가장 흔한 인권침해 유형은 폭언(81.0%), 직장 내 괴롭힘·갑질(69.3%)이었다. 가해자는 선임 간호사(53.3%), 의사(52.8%)가 가장 많았다. 이어 환자 및 보호자(43.0%) 순이었다. 특히 폭언·갑질의 79%가 환자나 보호자 등 제3자가 있는 곳에서 발생했다는 답변이 심각한 실태를 드러냈다.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이 바로 그 환자 앞에서 공개 폭언과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
아픈 사람들 앞에서 의료진끼리 폭언·갑질…이렇게 환자 무시해도 되나?
평소 간호사를 신뢰하고 의지하던 환자는 폭언·갑질 장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 간호사는 왜 선배 간호사, 의사로부터 폭언을 들어야 했을까? 이유를 따지기 전에 환자와 보호자는 먼저 당혹감, 무시당하는 느낌부터 받았을 것이다. 간호사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도 심한 야단을 맞을까? 앞으로 환자들은 해당 간호사를 대하기가 민망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간호사의 위상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선배 간호사가 스스로 직업적 존중을 깎아내리는 어이없는 행동을 했다며 혀를 차기도 한다.
이번 실태조사에 응한 간호사들은 폭언·갑질의 원인으로 선후배 간 권위적·수직적 관계를 꼽았다. 이는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으로 ‘갑질 문화’와 부적절한 언행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간호사 인권침해의 근본 원인으로 의료현장의 만성적인 인력 부족이 지목된다. 과도한 업무와 교대근무로 인해 간호사 간 위계와 갈등이 깊어지고, 피로 누적이 폭언·괴롭힘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간호사의 휴직·사직 등 숙련 인력의 이탈로 직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폭언·갑질 당해도 ‘무대응’ 71.8%…“신고해도 변화 없어”
폭언·갑질 등 인권침해를 경험한 간호사 중 71.8%가 ‘무대응’을 선택했다는 것이 놀랍다. 그 이유로 “신고해도 변화가 없을 것 같아서”(67.2%)가 가장 많았다. 공식 절차를 통한 신고는 15.0%에 불과했고, 상층부에 알려도 “변화가 없었다”는 응답이 69.0%에 달했다. 이는 현행 신고 제도가 실질적인 보호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간호사들은 폭언·갑질을 뿌리 뽑기 위해 가해자에 대한 처벌 기준을 강화하고, 갑질 신고자 보호 시스템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배·간부 간호사들의 리더십도 문제…“간호사 사회도 다 바꿔야”
대부분의 간호사들은 ‘태움’이라는 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재가 될 때까지 태움’이란 의미이다. 간호사 간의 직장 내 괴롭힘으로 거의 일반화된 용어다. 태움 가운데 욕설, 외모 비하, 인격 모독적 발언 등 폭언이 가장 많다. 이번 조사결과는 태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군기가 생명인 군에서도 언어폭력이 사라지고 있다. 상급자라도 말 한 마디에 수사까지 받을 수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갑질, 폭언 논란이 일어나면 사표까지 내야 한다. 후배를 질책할 때도 언어 선택에 조심할 수밖에 없다.
2년여 동안의 의정 갈등의 영향으로 교수, 전공의 간의 권위적, 수직적 관계도 예전같지 않다. 이 참에 과거 일제 강점기 시대의 도제식 교육 시스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있다. 간호사 사회도 다 바꿔야 한다. 인력 부족이 가장 크지만 간부들의 리더십도 문제다. 과거처럼 암묵적으로 태움을 용인하던 선배들의 ‘나쁜 전통’은 없어져야 한다. 폭언·갑질로 언젠가는 수사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외부인들로부터 간호사를 보호해야 할 선배들이 오히려 가장 많은 가해자로 나타났다. 군대, 기업 등 거의 모든 분야의 리더십이 변했다. 간호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