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제패한 대영제국 황금기엔 이 사람들이 있었다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20. 용감한 스코틀랜드와 영국 홍차
대영제국 홍차를 마실 때마다 내 앞을 행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끄럽고 호쾌한 음색의 백파이프로 연주하는 스코틀랜드 민요 ‘용감한 스코틀랜드’(Scotland the brave)에 발맞추어 씩씩하게 걸어가는 이들은 스코틀랜드 부르스 형제, 로버트 포춘, 제임스 테일러, 립톤이다.
이 민요의 가사처럼 그들은 피가 끓어 오르고, 높이 솟아오르고, 용맹하고, 진취적이었다. 이들 덕에 나도, 세계인들도 지금 대영제국 홍차를 마실 수 있다.
유럽인들이 차를 마시게 된 때 현재의 WTO와 같은 세계 무역 분업체제가 존재하였다면, 중국은 차를 제작하여 영국으로 수출하고 영국은 모직물을 값싸게 중국으로 수출하였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국가 간 이익 다툼이 기본인 세계 무역에서 갈등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세계 자원의 분배를 식민지화로 해결하려 들었던 지난 수 세기보다는 훨씬 평화로웠을 것이다.
차 무역이 아편전쟁을 불러와 가려졌지만, 영국은 중국 밖에서 차를 생산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멀리 떨어진 중국에서 가공하여 소비처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차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차와 커피
세계 시장에서 정상을 다투는 다른 음료인 커피는 사정이 달랐다. 커피는 생산지도 가까웠고, 보통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생두(生豆) 상태로 수입하므로 소비자가 로스팅과 분쇄 등 커피 가공법을 알게 되었다.
커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유럽 각국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식민지에서 커피 재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그보다 한 세기가 더 지난 18세기 말까지도 유럽인들은 중국 밖에서 차나무를 재배하지 못하였다.
최초로 중국 외에서 차나무를 발견한 유럽인은 탐험가인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브루스이다. 로버트 브루스는 1823년, 인도의 아삼지역 토착민 일부가 차나무 잎을 따서 차를 마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행히도 그는 다음 해 갑자기 죽었지만, 자신의 발견을 기록으로 남겼다.
동생 찰스 브루스는 형의 기록과 유품을 받고 아삼 차나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형이 완성하지 못한 일에 뛰어들었다. 곧바로 차나무의 표본을 동인도회사의 한 책임자에게 보냈지만, 담당자는 차나무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래도 찰스 브루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아삼에 거주하며 차나무 재배를 시작하였다.
후에 동인도회사의 차 무역 독점이 종료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 정부는 1834년 차 위원회를 구성하고 차 수입 관리에 나섰다. 이때 찰스 브루스는 차나무 씨앗과 아삼 차나무로 제작한 차를 차 위원회에 보냈다. 차 위원회는 “대영제국 역사에서 농산물에 관한 문제 가운데 이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흥분하였다.
로버트 & 찰스 브루스 형제가 시작한 인도 아삼차
찰스 부르스는 곧 상업적 재배를 시작하였고, 1838년 처음으로 아삼차는 영국으로 수출되었다. 이후 인도는 거대한 차 생산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은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차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차의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차 산업은 세계로 확대되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과업을 수행하였다. 변발을 붙이고 중국인 상인이나 관리로 가장하면서 차나무 묘목을 확보하였다. 그는 묘목이 죽지 않도록 특별히 설계된 유리 상자를 사용하여 수천 그루의 차나무와 씨를 반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가 반출한 중국의 차나무는 인도 대부분 지역에서는 재배에 실패하였지만, 다즐링에서 재배에 성공하여 지금도 이어져 온다. 아무리 미화해도 포춘은 제국주의 시대 식물산업 스파이였지만, 그 덕에 세계인들은 다즐링 차를 마신다.
스리랑카 실론티를 개척한 제임스 테일러
또 한 명의 스코틀랜드인이 스리랑카에서 실론 차 밭을 형성한다. 제임스 테일러(1835~1892)는 17세의 나이에 영국령 실론(현재의 스리랑카)으로 이주한다. 농업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실론의 중앙 고지대의 커피 농장에서 커피 재배 일을 시작하였다. 1860년대 중반, 실론에서 커피병이 확산되었고 커피사업이 초토화되었다.
제임스 테일러는 인도의 아삼 지방에서 배운 차 재배 기술을 실론의 기후와 토양에 적합하게 적용하여 차 재배에 나섰다. 1867년, 그는 차 재배에 성공하였고 곧바로 시장에서 주목을 받았다.
1872년, 그는 처음으로 실론 차를 영국으로 수출하였다. 그의 성공은 다른 농장주들을 자극하였다. 커피 농장은 일시에 차 농장으로 바뀌었다.
이후 실론은 차의 나라가 되었다. 그의 유산은 실론 차 산업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실론 차'라는 이름은 고품질의 차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국가 이름이 스리랑카로 바뀐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실론차’를 생산한다. 제임스 테일러는 오늘날까지도 스리랑카 차 산업의 아버지로 존경받는다.
'립톤티'의 창시자 토마스 립톤
스코틀랜드 사람 토마스 립톤도 영국 차 산업을 견인한다. 차 산업의 잠재력을 제대로 알아본 립톤은 차를 대중화하고 가격을 낮추기 위해 실론의 차 농장을 직접 매입하고, 중간 상인을 배제하여 직접 소비자에게 차를 판매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립톤의 차는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었고 뛰어난 마케팅 전략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차 상자에 "농장에서 찻주전자까지"라는 슬로건을 사용해 신선한 차를 제공한다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립톤의 성공은 차를 대중화하고, 오늘날 차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음료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립톤티'는 현재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차 브랜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처럼 스코틀랜드인들이 대영제국의 홍차 산업에 크게 이바지한 배경에는 용맹하고 혁신적인 민족성, 그들의 교육시스템과 시대 상황이 작용하였다.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견고한 교육시스템과 대학 전통을 유지했다. 특히 에든버러대학과 글래스고대학은 과학, 의학, 철학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지식과 영향력이 폭발하여 여러 분야에서 큰 영향을 미친 시기이다.
대학 시스템의 발전과 지식인들의 활발한 활동 덕분에 스코틀랜드는 계몽주의 시대에 지식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과학, 철학, 경제학, 역사학 등의 분야에서 지식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철학자이자 역사가 데이비드 흄, ‘국부론’의 저자인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증기 기관의 개량으로 산업혁명을 촉진한 제임스 왓트 등이 시대를 선도하였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산업혁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글래스고와 에든버러 같은 도시들은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스코틀랜드인들이 확장되어 나가는 영국제국의 무대에서 활약했다. 철강산업의 거물 앤드루 카네기,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 등이 스코틀랜드계이다.
영국 의학을 세계 1등으로 올려놓은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는 의료분야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에든버러대학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 한때 세계의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의학이론가 윌리엄 컬렌, 외과의 태두 존 헌터, 클로로폼 마취의 선구자 제임스 심프슨 등 의학자들이 활동하였다.
이 시절 에딘버러에는 세계 의학자들이 모여 의학의 용광로가 된다. 단순한 설명이지만 세계의학의 패권이 이탈리아-네덜란드-영국-프랑스-독일-미국으로 옮겨갔다고 흔히 설명한다. 여기서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를 의미한다. 후에도 스코틀랜드는 무균법을 수립한 조지프 리스터,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과 같은 혁신적인 의학자를 배출하여 전통을 이어간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할 때 스코틀랜드도 중흥기를 맞았고 내로라하는 세계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당시 가장 뜨거운 무역 분야인 차 산업에 뛰어들어 진취적이고 용맹한 민족성을 발휘하여 대영제국 홍차를 견인하는데 자신들의 역량을 양껏 발휘하였다. 용감한 스코틀랜드인들이 없었다면 대영제국 홍차도 없다.
유영현 엘앤더슨병원 진료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