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시·구급차 운전 기사들이 다른 직업군에 비해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숨질 위험이 가장 낮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길을 찾고 지도를 그리는 ‘공간 추론 활동’이 뇌를 튼튼히 단련시켜 치매를 막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호주 비영리 매체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따르면 2020년 1월~2022년 12월 미국 내 사망 증명서 약 900만 건을 분석한 대규모 연구에서 택시 및 구급차 운전기사는 443개 직종 중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사망 위험이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나이와 성별, 인종, 교육 수준 등을 보정해 비교했을 때 일반인의 알츠하이머병 사망 비율은 60명 중 1명 수준이었으나, 택시와 구급차 운전사는 약 100명 중 1명에 그쳤다.
이런 치매 예방 효과는 모든 운전 직종에 똑같이 나타나지 않는다. 정해진 노선만 오가는 버스 기사나 정해진 항로를 왕래하는 항공기 조종사는 이런 건강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사망 위험을 낮추는 핵심 요인은 운전 행위 자체가 아니었다. 변화하는 도로 상황에 맞춰 끊임없이 머릿속 지도를 업데이트하며 길을 찾는 ‘실시간 내비게이션 활동’ 덕분인 것으로 분석됐다.
뇌에서 기억과 공간 탐색을 담당하는 부위는 해마다. 해마는 알츠하이머병이 시작될 때 일찍 손상되는 영역이다. 길을 잘 찾지 못하거나 방향 감각을 잃는 증상은 뚜렷한 기억력 저하보다 먼저 나타나기도 한다.
2000년 발표된 또 다른 신경과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런던 택시 기사들의 뇌는 일반인의 뇌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운전 경력이 긴 택시 기사일수록 공간 지도를 저장하는 해마(특히 후부 해마)의 회백질 부피가 더 컸다. 또한 머리를 써서 공간을 파악하고 길을 외우는 훈련을 하면 성인의 뇌 구조가 물리적으로 강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런던에서 택시 면허를 따려면 차링 크로스에서 반경 6마일(약 9.7km) 이내에 있는 2만5000개 이상의 거리 이름과 위치를 외워야 한다. 이를 위해 택시 기사 지망생들은 평균 3~4년에 걸쳐 ‘더 놀리지(The Knowledge)’라는 혹독한 시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미국 텍사스대 샌안토니오 캠퍼스 토목·환경공학과 하팀 샤리프 교수는 “택시·구급차 운전 기사에게 나타나는 두뇌 단련 효과는 지도 제작자, 도시 계획가, 지리정보시스템(GIS) 전문가처럼 입체적인 공간을 다루는 직업이나 복잡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밝혔다. ‘더 컨버세이션’에 쓴 칼럼을 통해서다. 그는 “2023년 머신러닝을 이용한 연구 결과를 보면 교차로가 많고 길목과 랜드마크가 다양해 머릿속으로 지도를 자주 그려야 하는 복잡한 도심 지역 거주자일수록 알츠하이머병 발병률이 더 낮았다”고 덧붙였다.
샤리프 교수는 “일상에서 공간을 입체적으로 인지하고 경로를 떠올리는 두뇌 활동이 뇌 손상에 저항하는 ‘인지 예비력’을 키워준다”고 설명했다. 지도나 내비게이션 화면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 머릿속으로 주변 공간과 길을 직접 떠올려보는 습관이 알츠하이머병 증상을 늦추고 뇌 건강을 지키는 훌륭한 훈련법이 될 수 있다.
[자주 묻는 질문]
Q1. 복잡한 골목길이나 도심 환경에 사는 것만으로도,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A1. 그렇습니다. 교차로가 많고 주변 랜드마크와 길목이 복잡한 환경에 거주하면 일상 이동 중에도 뇌가 자연스럽게 지도를 그리며 공간을 추론하게 됩니다. 연구 결과를 보면 복잡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 뇌의 공간 탐색 영역 부피가 더 크고, 알츠하이머병 발병 위험도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Q2. 성인이 된 이후에 공간 지각 훈련을 시작해도 뇌 구조가 변할 수 있나요?
A2. 충분히 가능합니다. 런던 택시 기사 연구에서 확인되었듯, 해마의 부피 변화는 선천적인 유전 요인이 아니라 성인이 된 뒤 훈련과 경력을 쌓으며 형성된 결과였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 머리를 쓰고 새로운 공간 지각 연습을 하면 뇌의 구조적 저항력(인지 예비력)을 충분히 키울 수 있습니다.
Q3. 컴퓨터 화면으로 지도 데이터를 다루는 GIS 전문가나 도시 계획가도 택시 기사와 같은 두뇌 단련 효과를 얻을 수 있나요?
A3. 실제 거리에서 직접 이동하는 것과 상공에서 지도를 내려다보는 방식(배심적 추론)에는 관점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 뇌의 해마는 외부 관점에서 입체적 지도를 구축할 때도 동일하게 활성화됩니다. 따라서 여러 층의 공간 데이터와 좌표를 머릿속에서 조합하는 전문 작업도 뇌 회로를 자극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