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 병을 앓은 적이 없는 40세 미국 여성이 최근 1주일 동안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 못하고 심한 피로감, 양다리 무력증, 운동 실조 등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이 환자는 월경과다 및 질 입구에 생긴 물혹(왼쪽 바르톨린 낭종)으로 진료를 받은 적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건강하게 지냈다.
미국 에드워드 비아 정골의대 연구팀에 의하면 이 흑인 중년 여성의 각종 증상은 수년 동안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이 환자는 메스꺼움, 담즙성 구토, 변비, 뜻밖의 체중 감소 등 다양한 증상을 보였다. 최근엔 기침과 운동 시 호흡 곤란을 겪었다. 하지만 최근 10년 동안 병의원의 진료와 정기적인 추적 관찰을 거의 받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한 당시 환자는 빈맥, 저혈압, 무기력증을 보였고 혈역학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신체 검사 결과 가벼운 정도의 황달, 다리 근력 약화, 무릎 아래 부위의 감각 및 고유 감각 장애, 보행 실조증 등이 관찰됐다.
혈액 검사에서는 혈액 내 산소를 나르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치의 4분의 1 수준(3.2g/dL)르로 뚝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당장 수혈이 시급한 중증 빈혈 상태였다. 백혈구·혈소판 수치까지 급감해 있었고, 혈관 내 세포가 파괴될 때 나오는 젖산탈수소효소(LDH)는 정상치의 10배 이상 치솟아 있었다.
연구팀은 처음에는 희귀한 혈액병인 ‘혈전성 혈소판감소성 자반증(TTP)’을 의심했다. 그러나 정밀 추적 결과, 환자의 몸속에서 검출된 비타민 B12 수치가 놀랍게도 제로(0)에 가까워 측정할 수 없는 상태임을 발견했다. 위벽 세포에 이상이 생겨 비타민 B12를 흡수하지 못하는 자가면역병이 바로 이 환자가 겪는 악성빈혈의 근본 원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환자는 응급실에서 곧바로 근육 내 비타민 B12 주사 처방과 영양 보충, 항생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환자의 혈액 수치는 빠른 속도로 정상화하고, 신경 마비 증세도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사례 연구 결과(Pernicious Anemia Mimicking Thrombotic Thrombocytopenic Purpura in the Setting of Severe Vitamin B12 Deficiency)는 최근 국제 학술지 《큐레우스(Cureus)》에 실렸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국내 비타민 B12 결핍증 환자는 전체 인구의 약 1~3% 수준으로 추정된다. 국내 10세 이상 국민의 비타민 B12 결핍 및 경계 결핍 비율은 남자 2.9%, 여자 1.1%인 것으로 나타났다. 혼자 사는 남자 노인이 특히 결핍에 취약할 수 있다.
연구팀에 의하면 비타민 B12 결핍은 단순히 빈혈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이번 사례와 학술적 분석을 종합하면 비타민 B12 결핍증은 의학적으로 구별되는 7가지 병태(질병으로 나타나는 신체적·생리학적 상태나 변화)를 동반하며 총 18가지의 전신 및 신경계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이 사례는 비타민 B12 결핍증 환자의 몸이 ‘병태·증상 백화점’으로 변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비타민 B12는 인체 세포의 설계도인 DNA를 합성하고 뇌에서 뻗어나오는 척수 신경망을 유지하는 핵심 보조인자다. 따라서 이 비타민이 극도로 결핍되면 체내 DNA 합성이 전면 중단된다.
몸 안에서 DNA 합성이 멈추면 뼈 속 골수에서 정상적인 적혈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구조가 찌그러진 불량 적혈구만 만든다. 이 때문에 골수 내부에서 스스로 파괴되는 ‘골수내 용혈’이 일어난다. 피를 만드는 모든 계통이 망가지면서 적혈구뿐 아니라 백혈구, 혈소판이 동시에 씨가 마르는 ‘전혈구 감소증’과 ‘백혈구·혈소판 감소증’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특히 이 사례처럼 치명적인 희귀 혈액암과 거의 비슷해 ‘가성 혈전성 미세혈관병증’이라는 중증 혈액병까지 발병할 수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신경계 파괴다. 비타민 B12가 고갈되면 척수 신경을 감싸 보호하는 피막이 벗겨지면서 뒤와 옆의 척추 기둥이 썩어 들어가는 ‘아급성 복합 퇴행증(SCD)’과 ‘말초 신경병증’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다리 힘이 빠지고, 눈을 감으면 내 다리가 어디 있는지 느끼지 못하는 고유 감각 장애를 겪는다. 비틀거리다 걸을 수 없게 되는 운동 실조증도 나타난다.
더 나아가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 경직, 무릎을 톡 치면 다리가 과도하게 튀어 오르는 반사 과다가 발생한다. 발바닥을 긁으면 엄지발가락이 하늘로 펴지는 비정상적인 발바닥 신전 반사가 관찰된다. 혀의 돌기가 닳아 반들반들해지고 불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위축성 설염’ 증상도 나타날 수 있다.
비타민 B12는 달걀 노른자와 굴 바지락 홍합 등 조개류, 고등어 연어 참치 등 생선, 소고기 돼지고기 등 육류, 우유 치즈 요거트 등 유제품에 풍부하게 들어 있다. 채식주의자나 영양 불균형을 겪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타민 B12 결핍증에 걸릴 수 있다. 특히 위산 분비를 억누르는 역류성 식도염 약을 장기 복용한 사람, 위 절제 수술을 받은 사람, 위벽 세포를 스스로 공격하는 자가면역병이 있는 사람은 이 결핍증에 잘 노출된다. 음식을 아무리 잘 먹어도 몸 안에서 전혀 흡수되지 않는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리고 손발이 저리거나 중심을 잡기 힘든 증상이 나타나면 서둘러 병원을 찾아야 한다. 단순한 노화나 스트레스로 무시하지 말고 반드시 혈액 내 비타민 수치를 점검해야 한다. 영양 결핍으로 인한 손상은 초기에는 주사 치료만으로 완벽히 되돌릴 수 있다. 하지만 손상을 방치해 신경이 영구 파괴되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
[자주 묻는 질문]
Q1. 종합비타민제를 매일 챙겨 먹고 고기도 좋아하는데도 비타민 B12 결핍증에 걸릴 수 있나요?
A1. 네, 충분히 걸릴 수 있습니다. 비타민 B12는 영양소 중 흡수 과정이 가장 복잡합니다. 위산과 위에서 분비되는 특수 단백질(내인자)이 결합해야만 장에서 흡수됩니다. 따라서 위축성 위염이 심하거나, 위산 분비 억제제를 장기 복용 중이거나, 위 절제 수술을 받은 사람은 비타민을 많이 섭취해도 몸 안으로 흡수되지 않습니다. 비타민 B12 결핍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Q2. 비타민 B12가 부족해 생긴 빈혈 환자가 시중의 일반 철분제를 먹으면 치료되나요?
A2. 치료되지 않습니다. 흔히 빈혈이라고 하면 철분 부족을 떠올리지만, 비타민 B12 결핍성 빈혈(거대적혈구 빈혈)은 적혈구의 DNA 합성 자체가 안 돼 발생하는 병입니다. 철분 수치는 정상인데도 피가 만들어지지 않는 상태여서 철분제는 효과가 없습니다. 반드시 부족한 비타민 B12를 먹는 약이나 근육주사로 많이 보충해줘야 합니다.
Q3. 비타민 B12 결핍증으로 다리 마비나 감각 이상 같은 신경 증상이 오면 완치가 불가능한가요?
A3. 발견 시기에 따라 다릅니다. 신경 세포가 완전 괴사하기 전인 결핍 초기에 발견해 주사를 통한 비타민 B12 대체 요법을 신속히 시작하면 신경학적 마비 증세와 감각 장애는 대부분 회복됩니다. 오랜 기간 방치해 척수 신경의 탈수초화(피막 파괴)가 영구적으로 진행되면 치료가 힘듭니다. 설령 뒤늦게 치료를 하더라도 보행 장애나 감각 이상이 후유증으로 일부 남을 수 있습니다. 조기 진단이 매우 중요한 까닭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