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비아토르는 ‘길 위의 사람’, 즉 나그네를 뜻한다. 호모 비아토르는 ‘여행하는 인간’을 일컫는다.
작가 김영하는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이 문구를 인용한 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자신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그후로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행장을 꾸려 여행을 떠났다”고 들려준다.
“미래의 로봇들은 여행을 하게 될까?” 김영하는 이렇게 물은 뒤, 여행은 인간 고유의 활동임을 강조한다. 우선 유인원 중 어떤 동물도 사람처럼 자주, 멀리 이동하지 않는다. 이어 그는 “인간들의 여름휴가나 배낭여행 같은 것들을 로봇들은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상상한다. (여기서 로봇은 안드로이드를 지칭한다. 사람과 닮은 로봇은 휴머노이드와 안드로이드로 나뉘는데, 안드로이드는 피부를 비롯해 전신이 인간과 흡사한 존재를 가리킨다.)
지구에서 여행하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사람에게는 여행 욕구가 있다. 그 욕구를 충족하는 데서 큰 행복을 얻는다. 물론, 동물 중 장거리를 오가는 종이 많다. 철새가 그렇고 일부 어류와 고래도 긴 거리를 주기적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런 이동은 여행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들은 본능에 따를 뿐이고 그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지는 않는 듯하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가 연구한 ‘행복 칼로리표’의 결과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책 《굿 라이프》에 ‘행복 칼로리표’를 실었다. 재미와 의미를 각각 세로축과 가로축으로 잡고 설문조사를 통해 개별 활동이 재미와 의미를 얼마나 주는지 답변을 받아 배치했다.
그 결과 가장 재미나고 유의미한 활동으로 여행이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여행이 종합적으로 가장 큰 행복을 준다는 것이다. 운동과 사교활동은 물론, 데이트까지 여행이 주는 재미와 의미를 따라오지 못했다. 쇼핑과 음식섭취는 재미는 어느 정도 주지만, 의미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음주는 의미에서는 두 활동보다 약간 떨어졌지만, 재미에서는 더 높게 평가됐다. 재미 축에서 마이너스로 밀려난 활동들에는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수업이 가장 재미 없는 활동이었고, 그 다음이 일, 집안일이었다.
여행은 의미 축에서도 다른 활동을 크게 앞섰다. 의미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활동은 여행, 종교활동, 자원봉사, 운동, 요리, 데이트, 산책, 육아 순이었다.
왜 그럴까? 왜 여행이 운동보다, 심지어 데이트보다 더 큰 재미를 선사할까? 데이트와만 비교하면, 남녀 간 데이트에는 긴장과 스트레스를 동반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이 종교활동보다 더 큰 의미를 준다는 답변은 선뜻 납득되지 않는다.
‘여행 욕구가 성적 욕구보다 강하진 않을 텐데…’
“인간의 여행 욕구가 그만큼 강력하다.” 이렇게 답하면 간단하긴 한데, 뭔가 석연치 않다. “여행 욕구가 성적 욕구보다 강하다고?” 등을 비롯한 반론을 피할 수 없다.
여기에서 여행이 인류의 이동에서 자리잡은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동에는 일상적인 이동과 장거리 이동, 방랑, 이주, 여행이 포함된다.
선사시대까지는 기후 변화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먹이를 찾아 이동하고 이주했다. 일상적으로는 수렵과 채집을 위해 여느 영장류보다 많이 뛰고 걸었다. 생존을 위한 이주는 근대에도 나타났다. 감자 대기근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아일랜드인이 신대륙으로 떠난 대이동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한편 고인류의 이동에 대해 ‘장거리 이주가 인간의 본능’이라고 설명하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소 오해가 포함됐다. 《이주하는 인류》는 “선사시대 인류의 이동은 엄청났다”며 “또 다른 이주민들은 육로를 따라 시베리아로 갔고, 베링 해협을 건넌 다음 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지금의 칠레인 아메리카 남단까지 내려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인류학자 이상희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대 교수는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었을까?》에서 이는 “어떤 집단의 인구가 늘어나면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는 확산”이어서 “이주 또는 이민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고대 이후부터 군대와 상인이 대대적으로, 끊임없이 이동했다. 정복 전쟁으로 이룩된 제국이 외침으로 해체되거나 붕괴되는 과정이 반복됐다. 실크로드와 해상 교역로를 통해 상인들은 문물을 교류했다. ‘모든 길이 통한다’는 로마의 길은 전쟁과 교역의 통로였다.
유럽인은 기독교 순례길, 조선 선비는 주자학 산행길 나서
여기에 종교적인 열망이 사람들의 이동 동기에 추가됐다. 서양에서 기독교도는 초기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했고, 중세 이후에는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로마와 큰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순례길도 다녔다. (작가 김영하가 인용한 ‘호모 비아토르’의 개념이 처음 제시된 것은 유람이 아니라 성지 순례처럼 종교적인 맥락에서였다. 이 개념을 만든 프랑스의 기독교적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1889∼1973)이 이를 통해 나타내려 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인간이었다. 책의 부제는 ‘희망의 형이상학 입문’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산을 오가는 활동이 성리학적 수양이었다. 조선 선비들은 산을 유람한 경험을 적은 유산기(遊山記)를 즐겨 적었다. 한국국학진흥원 등이 디지털로 수록한 유산기가 1500편에 이른다. 이는 조선이 정치 이념이자 선비의 수양 철학으로 수용한 성리학의 완성자 주희(1130~1200)가 남악(형악)을 유람하면서 쓴 글 ‘남악유산후기’를 본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기존의 상업적 동기가 더욱 강력해졌고, 여기에 미지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열이 결합됐다. 신대륙 탐험과 과학 탐사, 지리 조사, 생태 연구 등이 위험을 무릅쓴 가운데 역동적으로 진행됐다. 이와 같은 지적 탐구는 상업적인 동기와 맞물린 것이기도 했다. 지리 조사는 안전한 항해에 필수적인 지도 제작과 관련이 있었고 식생 조사의 한 자락에는 상업적인 재배라는 용도가 깔려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 오늘날 여행의 원형이 개발됐다. 근대 유럽에서 여행은 교양과 신분을 증명하는 활동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17~18세기 영국 상류층 청년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순회한 여행은 유적과 미술에 대한 견문을 넓히면서 엘리트로 성장해가는 과정이었다. 여행 경험은 사교계에서 공유되는 문화 자본이 됐고, 외국어 능력과 예술 취향은 계급적 세련됨의 표지가 되었다. 즉, 여행은 지적 성숙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상류 신분을 과시하는 상징적 소비였다.
은희경 “낯선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탄력의 게임”
조직과 대중에서 소외되곤 하는 현대인은 여행에서 자아를 찾고 다독거려 주고자 한다. 이를 잘 표현한 작가가 은희경이다. 그는 여행을 주제로 한 산문집 《안녕 다정한 사람》에 기고한 글에서 여행을 ‘낯선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나로 돌아오는 탄력의 게임’이라고 정의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낯선 것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낯섦을 느끼는 건 익숙함에 의해서다. 그래서 낯선 것 가운데에 들어가면 간혹 내가 더 또렷이 보인다. (중략) 나라고 알고 있는 사람과 다른 나를 만나는 순간도 있다.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방식 안에서, 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뜻밖의 나와 맞닥뜨리는 것이다. 나는 여행에서 그런 순간들을 가장 좋아한다.”
현대인의 여행에는 소셜미디어라는 과시 수단이 장착됐다. 여행지에서 저마다 열심인 스마트폰 사진 촬영에서는 추억을 간직한다는 본연의 목적보다 지금 소셜미디어에 올려 자랑한다는 부차적 목적이 더 우선시되는 듯하다.
이동과 탐색 본능에 심미와 식도락 더해진 종합세트
이로부터 여행은 근대 이후 경제력을 갖춘 계층을 중심으로 확산된 활동임이 드러난다. 또 이와 같은 이동의 역사를 최인철 교수의 연구에 비춰 생각해보면, 의무의 부담이 없는 이동에서 사람들은 온전한 기쁨을 누림을 알 수 있다. 인간의 DNA에는 추적 사냥의 본능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달리고 걷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이 있다. 그런데 이 본능에서 수렵ᆞ채집의 짐을 내려놓으면 재미가 생겨난다. 늑대한테는 재미난 산책이 없는 반면 반려견에게는 그런 산책이 가능한 차이가 여기서 나온다. 늑대에게는 칼로리를 얻기 위한 사냥이 아니라 목적 없는 이동은 에너지 낭비이고 그럴 여유가 없다. 사람에 의해 생계가 해결된 개에게는 산책이 즐거움만 주는 활동이다. (여행도 가이드한테는 일이다. 그에게는 관광객의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과 개를 포함한 늑대는 기본적으로 추적 사냥 동물이다. 선행인류도 이동 자체에서보다는 사냥과 관련지어 경로와 그 주위 지역을 탐색하는 활동을 해왔다. 인간의 이동 본능은 탐색 본능과 함께 작동한다. 늑대와 달리 사자는 매복해 있다가 거리를 좁혀 덮치는 방식으로 사냥한다. 고양이가 산책을 원하지 않는 까닭이다.

의무 없는 이동은 본능이자 재미의 원천이되, 문화권에 따라 인식의 차이는 있었다. 유럽에서는 wanderlust라고 해서 ‘방랑벽’이라는 취향을 나타낸 데 비해 조선에서는 역마살이라고 표현해 사람을 해치는 기운이라고 여겼다. 멀리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다른 데서 비롯된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럼 왜 여행이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줄까? 우선 업무 부담 없이, 경제적 부담은 치르지만, 새로운 곳을 이동하고 탐색하고자 하는 본능을 충족해준다. 또 미적 향수 욕구를 채워준다.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데, 여행은 자연과 문화유적, 미술작품을 통해 이를 만족시켜준다. 게다가 식도락의 즐거움도 선사한다. 아울러 예외가 있긴 하지만 함께 다니는 일행과 교류하는 데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는 가운데 자아를 되찾고 다시 세울 수 있다. 요컨대 여행은 종합 행복세트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재미와 의미에서 다른 모든 활동을 능가하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이동하는 동물이었다. 주변 지역을 탐색하면서 추적 사냥하고 채집했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인근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 정주로 생활양식이 바뀌었다. 그럴수록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것을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진다. 아울러 낯선 곳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재발견하고 싶다는 욕구가 차오른다. 다른 여러 즐거움 외에 여행이 근원적으로 충족해주는 것은 ‘마음의 길’을 걷고자 하는 갈망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