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건강도 되찾는다면...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⑨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7완다가'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소설은 이야기다. 대개는 재미가 있고, 줄거리를 놓치지 않는 한 속도를 내어 읽을 수 있어 통독이 쉬웠다. 두꺼운 세계명작소설들도 학창시절에는 내달려 읽어냈다.

그러나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쉽게 읽히지 않았다. 작가 스스로 표현하듯 “고전적 소설과 전혀 닮은 데가 없는” 이 소설은 스토리가 실로 애매하였다. 등장 인물들 간의 대화와 사건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아니고, 화자의 의식 흐름으로 진행되어 내용 파악이 어려웠다.

학창 시절, 이 두꺼운 소설을 읽으려 몇 번이나 시도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라 불리던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 내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러다 소설을 읽는 나이를 넘겨버린 후, 이 소설과의 관계는 끝나버렸다.

하지만 내가 차인(茶人)이 된 후, 이 소설은 차와 함께 내게로 다시 다가왔다. 소설 초입부에서 주인공 마르셀은 차를 마시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좀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새로 발견한 것들

“어머니께서는 평소 내 습관과는 달리 홍차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왠지 마음이 바뀌었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그 기쁨이 홍차와 과자 맛과 관련이 있으면서 그 맛을 훨씬 넘어 섰으므로 맛과는 같은 성질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억 회상 도구 차와 마들렌, 기억회상 과정을 설명한 현대 아티스트의 만화. [유영현 제공]
마르셀에게 차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감각의 기억’을 떠올리는 매개체로 기능하였다. 차 한잔과 마들렌 한 조각으로 그의 기억이 회복되었다. 차는 감각을 회복하고, 감각과 연결된 기억을 회복하며, 감정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되살리는 기능을 하였다. 이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외부세계와 단절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하는데 몰두한 시기는 20세기 초반이었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이 파괴되어 사라진 후에도 시간을 회복하는 것은 감각이다. 감각은 살아남아 생명력을 유지한다. 냄새와 맛과 같은 감각적 경험은 기억과 연결되어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여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만든다.

20세기 초반까지 대부분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은 감각과 의식을 별도의 분리된 과정으로 보았다. 감각은 신경계의 물리적인 반응으로 기억과 같은 의식은 감각 자극을 처리하는 정신적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감각과 의식의 관계가 더 복잡하게 이해된 것은 그가 소설을 발표하고도 오래 지나서이다.

"감각~뇌~기억" 연결 회로 찾아낸 현대의 신경과학

그가 이 소설을 쓰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신경과학자들은 감각이 뇌에서 처리되어 기억으로 저장되는 회로를 밝혀내었다. 감각 자극이 뇌의 특정 영역을 자극하면 관련된 기억이 활성화된다. 특정 감각 자극은 과거의 경험과 연결되어 기억을 회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경과학자들은 해마와 편도체를 연구하여 기억 회상은 뇌의 특정 회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밝혔다.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고 저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기억 회상 시에는 다양한 뇌 영역이 활성화된다.

특히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기억과의 연결이 더 강하다. 이는 후각 정보가 뇌의 편도체와 해마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 감정과 기억을 동시에 자극하기 때문이다. 특정 향기는 과거의 특정 장소나 사람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 냄새는 강렬한 감정적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냄새와 기억은 우리 문학에서도 주제가 되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학자이자 스타일리스트(stylist)라 불리는 김화영 선생은 수필 ‘냄새와 기억’이라는 탁월한 산문 하나를 남겼다.

서정주 시인은 향을 좇는 사람들이 유독 집착하는 침향에 대한 시에서 참나무 묻어 두는 사람들과 수백 수천 년 뒤 이를 꺼내 침향 맡을 사람들 사이의 그 긴 시간은 “침향 내음새 꼬옥 그대로 바짝 가까이 그리운 것”이라 하였다.

당나라 시인 노동(盧仝)은 차에서 무엇을 발견했던 것일까

차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시 한 편이 있다. 당나라 시인 노동(盧仝, 795~835)의 '7완다가'(七碗茶歌). 차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되는 7잔의 차에 대한 시에서 노동은 “첫 잔은 목구멍과 입술을 부드럽게 적시고, 둘째 잔은 외로움과 번민을 씻어주네. 셋째 잔은 메마른 창자에 닿으니 오천 권 분량의 글자를 생각나게 한다”고 썼다.

특히 "책 5천 권 분량의 글자를 생각나게 한다"는 구절에서 차가 기억을 상기시킨다는 뜻을 표현하였다. 실제 차를 여러 잔 마시면 갑자기 할 말이 많아지고, 뭔가에 홀린 듯 이야기를 이어가게 된다.

나 또한, 차를 마시는 자리가 늘어가면서 차의 향기와 맛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경험도 함께 늘어갔다. 그러면서 ’차 클리닉’(tea clinic) 계획까지 더 구체화 되었다. 환우가 차를 마시고 좋은 기억을 불러올 수 있다면, "차가 치유(治癒)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섰다.

차 마시고, 건강하고 좋았던 날들 불러올 수 있다면

차는 감정도 불러일으킨다. 감정은 특정한 기억이나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 차향은 대개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 감정으로 회상되는 기억 역시 대개는 행복한 기억이다.

기억과 감각이 회복되면 환자는 현재 상태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된다. 안전하고 행복한 감정은 그 자체로도 환우들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

안전하고 행복한 감정은 자신의 인생과 치료에 대하여 희망을 품고 치료에 임하도록 도움을 준다. 질병을 자신에게 닥친 고약한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고 깨어진 평행을 복구할 기회라고 생각하게 한다.

행복한 감정은 자연 방어력을 높인다

그뿐만 아니라 차가 불러온 안전하고 행복한 감정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상상을 하도록 허락한다. 암 발생 이전에는 누구에게든 면역기능을 포함하여 자연 방어력이 작동한다. 자연 방어력이 손상되어 암이 발생하였지만 깨어진 평형이 회복되면 몸속 자연 방어력은 다시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

차는 안전하고 행복한 감정을 이끌어 주어, 자연 방어력이 회복되어 암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상상을 하도록 한다. 자신의 인생과 치료에 대하여 좋은 상상을 하는 사람에게 좋은 치료결과가 기다린다.

감각 자극과 기억의 연결은 반복을 통해 강화된다는 이점도 있다. 자주 경험하는 감각 자극은 그에 대한 기억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회상하기 쉽게 만든다.

차를 반복해 마시면서 회상되는 안전하고 좋은 기억은 더욱 강하여진다. 이렇게 강화된 기억은 암과 투병하는 세월 동안 암을 이겨나가는 내내 강력한 투쟁 도구가 된다. 그래서 나의 차 클리닉은 프루스트 표현을 빌자면 “환우들의 잃어버린 시간 찾아주기”다.

유영현 앨앤더슨병원 진료원장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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