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셔틀콕 천재소녀' 황선애는 어떻게 사라졌나!!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특별기고] 안세영과 황선애
81년 전영오픈 우승으로 전 세계가 깜짝
부상 아픔 참으며 출전 거듭하다 악화
테이핑하거나 마취 주사 맞으며 대회 나가
협회나 지도자 본인 모두 당연한 것으로 여겨
안세영 훨씬 이전에 황선애(1962∽)가 있었다. 황선애도 ‘셔틀콕 천재 소녀’였다. 이미 여고 3학년 때(1979년) 종합선수권 여자 단식 정상에 올랐다. 안세영이 중3 때 성인들을 모조리 꺾고 국가대표가 된 것보다는 조금 늦었다. 하지만 황선애 또한 ‘평지돌출의 천재’임에는 틀림없었다. 마침 황선애와 안세영은 키도 170cm로 똑같다. 둘 다 배드민턴 치기에 안성맞춤의 신장을 타고났다.
황선애는 1977년 마산성지여고 1학년 때부터 1981년 한국체대 2학년 때까지 종합선수권 여자복식에서 5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그 무렵 박주봉(1964∽)도 전주농고 2학년인 1981년 종합선수권 남자 단식에서 어른들을 차례로 꺾고 패권을 차지했다. 그는 남자배드민턴 천재 소년이었다.
당시 한국 배드민턴은 세계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있으나 마나 존재 가치가 희미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것도 비슷한 무렵에 천재 소년 소녀가 불쑥 튀어나왔다. 대한배드민턴협회로선 하루아침에 로또 맞은 기분이었다. 입이 벌어져 귀에 닿을 지경이었다.
1981년 황선애는 제71회전영국오픈대회 여자단식에서 우승했다. 당시 황선애는 19세 소녀에 불과했다. 게다가 여자복식에서도 마산 성지여고의 김연자-유상희조가 3위를 차지했다. 한마디로 한국배드민턴 역사상 일대 사건이었다. 변방의 한국배드민턴이 세계무대에서 처음으로 만천하에 우렁찬 트럼펫 소리를 울린 것이다.
전영오픈대회가 어떤 대회인가. 한마디로 1899년부터 열린 명실공히 세계최고 권위의 대회였다. 1,2차 세계대전 때를 제외하곤 해마다 빠짐없이 열렸다. 당시엔 개인 세계선수권대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 대회에서의 단식 우승자가 곧 세계챔피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선수들도 그 무대에 서보는 게 평생 꿈이었다. 처음 그 무대를 밟는 선수는 너무 긴장해 제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대회였다. 그런데 배드민턴 변방 한국의 10대 소녀가 처음 참가한 전영오픈에서 단숨에 세계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것이다.
국제배드민턴연맹(IBF)은 한 달 뒤 4월에 1980∼1981시즌 성적발표를 했다. 황선애가 단연 세계랭킹 1위였다. 12개 국제대회 참가선수 720명을 점수로 환산한 결과 이중 5개 대회만 참가한 황선애가 1104점으로 맨 꼭대기에 있었다. 덴마크 캐펜이 920점으로 2위, 인도네시아 이바나가 860점으로 3위.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에밀 테르메츠 당시 국제배드민턴연맹(IBF) 국제대회위원장 겸 유럽배드민턴연맹회장이 ‘세기의 배드민턴 남녀대결’을 제의했다는 것이었다. 즉 황선애(19)와 1950년 전영오픈 남자단식 챔피언 말레이시아 웡펭순(54)간의 남녀 성대결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갖자는 것이다. 왕복항공료 체재비는 물론 승패와 관계없이 두둑한 상금도 주겠다고 제의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한국배드민턴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세계 각국 배드민턴협회에서 초청장이 몰려들었다. 그해 5월 인도배드민턴협회는 배드민턴의 발상지 인도 푸나에서 열리는 프라이즈머니 국제대회(11.10∼14)에 황선애와 김연자를 초청했다. 항공료와 체재비를 부담할 테니 안심하고 오기만 하라는 것이다. 8월 홍콩국제우수선수초청대회에도 초청받았다. 그 대회는 IBF-WBF 통합기념대회인데다 당시 중공과 대만의 대결로도 세계의 관심이 모아진 대회였다. 한국 영국 일본 인도네시아 중공 대만 등 6개국에서 7명의 내로라하는 선수가 초청을 받았다. 한마디로 황선애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이었다. 일일이 모두 응하다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전영오픈배드민턴 선수권대회 우승자는 사실상의 세계챔피언이다. 왜냐하면 국제배드민턴여맹(IBF)이 개최하는 세계선수권대회는 국가대항전인 우버컵(여자)대회와 토머스컵(남자)대회가 있을 뿐 개인전은 없기 때문. 다시 말해 71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전영오픈은 개인전 세계챔피언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전영대회 이외에 29년 역사의 덴마크오픈, 26년의 스웨덴오픈과 일본오픈 등이 세계 최고수준의 대회로 꼽히고 있는데 황선애는 일본, 스웨덴대회에 이어 영국대회까지 석권,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세계챔피언이 된 셈이다. 한국은 2년마다 열리는 토머스컵대회나 3년마다 열리는 우버컵대회 본선에 나간 적이 없지만 처음 유럽 무대에 나선 황선애의 우승으로 국제무대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케 되었다. -동아일보 1981년 3월 30일자 윤득헌 기자
황선애는 1981년 전영오픈 우승하던 그해 1월부터 펄펄 날았다. 대만초청대회(1.16∼1.18.)에 참가할 때까지만 해도 과연 국내 챔피언 황선애가 세계무대에서 얼마나 통할지 궁금했다. 황선애는 8강전에서 네덜란드의 엠리더에게 2-0, 4강전에서 인도네시아 타피수미에게 2-0으로 가볍게 이겼다. 그리고 결승에서도 영국의 왼손잡이 제인 웹스터를 11-5, 11-2로 꺾어 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열린 제1회 일본오픈대회(1.23∼1.25.)에 참가했다. 당시 일본여자배드민턴은 세계 최강이었다. 1980년 세계여자단체선수권대회(우버컵) 챔피언이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에는 1980년 전일본 챔피언 토쿠다 야스코, 1977∼78년 세계여자챔피언 유키 히로에 등 강호들이 즐비했다. 더구나 일본오픈은 그해 총상금 1000만엔(당시 한화 약 3000만원·남자단식 우승 100만엔, 여자단식 우승 90만엔)을 내걸고 야심 차게 출범한 첫 대회였다. 내로라하는 세계 강호들이 앞다퉈 참가했다. 다만 당시 세계 최강의 하나인 중공만은 참가하지 않았다. 중공은 1978년 IBF를 탈퇴하고 WBF를 만들어 독자노선을 걷고 있었다. 일본오픈대회 주최 측에선 처음부터 한국은 초청 대상이 아니었다. 참가하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결국 한국은 대한배드민턴협회의 항공료 체제비 등 자비 부담으로 가까스로 참가할 수 있었다. 숙소도 대회 선수단이 묵고 있는 호텔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곳에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배드민턴 변방국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서러움이었다.
다행히 황선애는 일본 오픈에서도 거칠 것 없었다. 1회전에서 미국의 켈리를 2-0으로 가볍게 제친 뒤 2회전에서 곧바로 1977,78 월드컵대회 챔피언 일본의 유키 히로를 만났다. 첫 세트를 내줬지만 2세트부터 대반격에 나서 2-1로 역전승을 거뒀다. 이때부터 세계 배드민턴 전문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습게 봤는데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8강전에서 덴마크 라르센을 2-0, 4강전에서 캐나다 카터를 손쉽게 2-0으로 누르고 마침내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일본챔피언 도쿠다 야스코. 둘 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손에 땀을 쥐는 접전을 벌였다. 첫 세트를 12-10으로 황선애가 가져왔지만, 두 번째 세트는 11-12로 야스코에게 넘겨줬다. 결국 3번째 세트에서 황선애의 강스매싱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11-7 승리. 1시간 8분에 걸친 대접전이었다.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IBF 모린회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한국선수단에 우승 축하를 건네며 즉석에서 두 달 뒤에 있을 전영오픈에 한국팀을 초청했다. 유이균 회장과 김봉섭코치가 상의한 끝에 즉각 참가하기로 약속했다. 조상호 당시 대한체육회장은 황선애의 일본오픈 우승에 축하전문을 보냈다.
한국배드민턴이 최초로 국제대회에서 우승, ‘골목스포츠’에서 ‘국제경기유망종목’으로 탈바꿈,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한국은 제1회 일본오픈배드민턴선수권대회에 한국체대의 황선애와 마산성지여고의 김연자가 출전, 세계적인 선수들을 물리치고 황은 금메달 김은 동메달을 차지, 꾸준히 쌓아온 한국배드민턴의 저력을 과시했다. 사실 한국은 주최국인 일본 측의 특별배려로 초청되어 자비케이스로 출전, 우리의 실력을 저울질해보려 했던 것인데 의외로 좋은 성적을 거두자, 하루아침에 그 대우가 달라진 것.
“대회 전후의 상황이 그렇게나 달라질 줄은 몰랐어요” 여자단식에서 우승을 한 황선애선수는 이렇게 그의 소감을 피력하면서 덴마크오픈(3월11∼15일), 전영국오픈(3월27일), 제1회 월드게임(7월·미국)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에 잇따라 초청을 받았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1962년 한국이 국제배드민턴연맹에 가입한 이래 24년 만에 세계무대에서 최초로 차지한 우승이며 참가선수들의 수준으로 보아 이 대회는 실질적인 세계선수권대회라는 점에서 더욱 반가운 사실.
“늘 겪는 일이지만 이번 대회서도 일본의 텃세는 어지간했어요. 그런데도 강호 일본을 거뜬히 눌러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심판들이 세이프와 아웃을 너무 편파적으로 선언한다는 것은 제삼국선수단들도 인정할 정도라고. “그러나 이겨보겠다는 강한 투지와 지난 11월부터는 국제경기 때와 같이 물오리털로 만든 셔틀콕으로 연습해온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현재 한국랭킹 1위의 황선애는 신탄진국민학교 5학년부터 배드민턴을 시작, 마산성지여고에 입학하면서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던 유망주. 1m70의 장신에 체중 65㎏으로 강스매싱이 주무기. “모처럼 국제대회에 길 트인 한국배드민턴을 세계정상에 이끌어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어요” 라고 다짐하는 황선애는 홀로된 박복례(57)여사의 1남2녀 중 막내딸. -동아일보 1981년 1월 30일자
1981년 3월4일 김봉섭 코치가 이끄는 한국대표팀(황선애 강행숙 김연자 유상희)은 유럽 원정길에 올랐다. 첫 대회인 덴마크오픈대회(3.11∼15)에 참가했지만 시차적응 실패로 황선애는 8강전에서 탈락했다. 2회전에서 덴마크 수잔느버그를 2-0, 3회전에서 영국의 헬렌 트로크를 2-0으로 제쳤지만, 일본 오픈대회 4강전에서 11-3, 11-5로 가볍게 꺾었던 캐나다의 웬디 카터에게 0-2(8-11, 10-12)로 무너졌다. 어처구니없게도 셔틀콕을 라켓에 맞추지 못하는 헛방까지 치며 패배했다. 그나마 김연자-유상희의 복식조가 3위에 오른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최종 우승자는 홈그라운드의 덴마크 레네 캐펜. 그녀는 황선애의 경기를 유심히 지켜본 뒤 “황선수가 유럽이 처음인데다가 시차적응을 못해 게임을 제대로 풀지 못한 것 같다. 언젠가는 나하고 결승에서 만날 것 같다. 참 좋은 선수”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말은 불과 한달도 안돼서 전영오픈에서 이루어졌다.
제71회 전영오픈대회(3.25∼3.29)를 앞두고 영국 ‘더 타임스’지는 황선애를 ‘동양에서 온 혜성’이라며 ‘우승 후보’로 사진과 함께 크게 실었다. 전영오픈의 상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자단식 우승상금은 1000파운드(당시 한화 약 150만원)로 일본오픈 90만엔(당시 한화 약 270만원)보다 훨씬 적었다.
황선애는 2번 시드를 받아 곧바로 2회전에 진출했다. 2회전에서 영국의 칼빙턴을 2-0(11-3, 11-4), 3회전에서 일본의 기타다를 2-0(11-1, 11-2), 8강전에서 대만오픈 결승에서 만났던 영국의 제인 웹스터를 2-0(11-6, 12-10)으로 꺾었다. 위기도 있었다. 웹스터와의 두 번째 게임에서 2-10으로 끌려가면서 거의 그 세트를 내줄 뻔했다. 황선애는 그 절체 절명의 상황에서 일단 ‘수비에 전념’하면서 기회가 올 때마다 손목 스냅을 이용한 변칙공격과 파워 스매싱으로 한 점 한 점 따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대역전극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숨 막히며 지켜보던 웸블리의 홈 관중들도 기립박수를 쳤다.
4강전 인도네시아 이바나와의 경기에선 발바닥이 헤어져 갈라진데다, 허벅지 근육까지 늘어났다. 더구나 체력이 바닥나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다행히 주최 측의 배려로 영국의사에게 마취 주사를 맞고 약을 복용한 뒤 코트에 나설 수 있었다. 첫 세트를 5-11로 내줬으나 몸이 풀린 2세트는 11-7, 3세트 11-0으로 승리했다.
결승전 상대는 전영오픈 3연속 우승을 노리던 세계 1위 덴마크의 노장 레네 캐펜. 하지만 황선애의 강력한 스매싱과 드롭샷에 힘 한번 못 쓰고 싱겁게 무릎을 꿇었다. 11-1, 11-2의 3점만 내 준 완벽한 승리였다. 경기 시간은 전영오픈 결승전 사상 최단 시간인 20분에 불과했다. 그때까지 배드민턴 국제경기 최단시간은 1969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열린 우버컵 대회 여자단식에서 일본의 다카키 노리코가 인도네시아의 두멘 콜을 격파한 9분이었다. 반대로 단식 최장기록은 무려 74시간 41분. 영국 스윈지에서 영국 마이크 와츠와 브라이언 가남 간의 남자 단식대결은 장장 사흘 하고도 2시간 41분이 더 결렸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치과의사를 하고 있던 스물일곱의 캐펜은 경기 후 “난 베스트 컨디션이었다.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황선애 선수는 매우 강하고 벅찼다. 내가 실수한 것이 아니라 황선수가 너무 강했다. 완벽했다. 앞으로 5년 동안은 세계여자단식에서 그녀를 이길 선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경기는 BBC TV로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한국에서도 배드민턴 역사상 첫 위성중계로 온 국민이 지켜볼 수 있었다. 당시 주영한국대사관의 강영훈 대사(1922∼2016·전 국무총리)는 “대사관의 10년 외교활동보다 한국배드민턴이 더 큰일을 냈다”며 기뻐했다. 세계 언론들도 ‘동양의 혜성’ ‘혜성처럼 나타난 동양의 마녀’ ‘한국스포츠의 신데렐라’ ‘놀라운 아이’등 온갖 찬사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국제배드민턴연맹에서 발행하는 《월드 배드민턴》에서는 황선애를 ‘무한한 힘을 가진 파이터’로 표현했고, 영국 잡지 《배드민턴》과 일본잡지 《배드민턴계》에서는 황선애를 표지모델로 싣고 3페이지에 걸쳐 소개했다. 이 중에서도 영국 잡지 《배드민턴》의 ‘Hwanged’라는 신조어가 압권이었다. 황선애의 성을 동사화한 것으로 ‘완벽히 분쇄하다’는 뜻. 황선애의 호쾌한 스매싱과 상대를 압도하는 경기력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황선애 신체 나이는 70대”…86아시안게임 앞두고 은퇴
동아일보는 1981년 3월30일자 1면에 특파원 발 기사로 ‘황선애 세계 정상에’라는 4단 컷 제목으로 게임 내용을 싣고 체육면 절반을 해설과 인터뷰기사 그리고 ‘황선애 가족들이 말하는 황선애’를 다뤘다. 또한 동아일보는 ‘금주의 얼굴’로 황선애를 선정했다. 중앙일보도 1면에 ‘배드민턴 세계제패’라는 4단 컷 제목으로 기사를 다루고 8면에 ‘아주 이어 세계 휩쓴 스타’로 황선애 이야기를 덧붙였다. 한국일보는 12면 절반을 황선애 기사로 채웠고, 3월31일자에는 ‘배드민턴여왕의 탄생, 황선애 선수 승전보에 감격 크다’는 사설까지 실었다. 경향신문은 시사만화에 황선애를 소재로 등장시켰다. 황선애는 “그때는 국제통화가 쉽지 않을 때인데 국내 언론사들로부터 밤낮없이 전화가 걸려오는 바람에 꽤나 시달렸다. 개인 일정이 뒤죽박죽되고 운동에도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처음에는 얼떨떨했지만, 그다음엔 내가 붕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우승의 실감이 났다”고 말했다. 당시 유럽 원정단을 이끌었던 김봉섭 코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당시 수신호로 일일이 황선애에게 사인을 내줬다. 큰 소리로 지시하다간 쫓겨나기 때문이다. 1점씩 딸 때마다 그다음은 어떻게 할 건지 코칭을 했다. 그러다보니 황선애는 경기가 끊길 때마다 매번 나를 쳐다봤다. 그걸 보고 외국팀이나 기자들은 신기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만큼 황선애는 나이가 어렸고 원래 마음까지 여렸다. 코치로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더구나 전영오픈이라는 세계 최고 무대가 처음 아닌가. 만약 잔뜩 긴장이라도 하면 가지고 있는 실력조차 발휘하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땐 지금처럼 코치 자리가 있는 게 아니어서 가까운 관중석에 앉아서 작전 지시를 했다. 옆 코트에선 김연자-유상희의 여자복식 경기가 있었지만, 미안하지만 그쪽엔 눈길조차 줄 여유가 없었다. 우승이 확정된 후 인터뷰가 있었는데 상당히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황선애가 스매싱을 때릴 때마다 내지르는 “얍!” 하는 소리는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난 태권도에서 하는 것처럼 ‘정신통일’ 하려는 일종의 기합소리라고 말해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봐도 황선애의 스매싱 때의 기합소리는 일품이었다. 특히 대각선스매싱이 내리꽂힐 때의 그 기합과 스매싱조합은 기가 막혔다. 그 다음 기자들은 주로 한국에 배드민턴전용체육관이 있는지, 혹은 선수가 몇 명이나 있고, 실업팀은 몇 개나 있는지 등을 물었다. 또한 황선애 선수의 라켓 셔틀콕 등 배드민턴용품은 충분한지 여부와 닭털셔틀콕으로 연습했다는 데 사실인지 등을 물었다. 아마도 한국의 열악한 배드민턴환경을 부각시키려는 질문들 같았다. 대충 얼버무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기자는 다짜고짜 ‘왜 이제 왔느냐?’고 물었다. ‘차마 돈이 없어서 못 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얼버무렸다. 결승전이 끝나자 주영한국대사관의 강영훈 대사가 코트에 내려와 황선애에게 악수를 하며 축하를 해줬다.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도움을 받을까하여 대사관에 전화를 했었다. 그 때 강 대사는 ‘그런 대회도 있나요’하며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황선애가 결승에 올라가자 대사관으로부터 황급히 ‘대사님 티켓 보내 달라’는 전화가 왔다. 또 우승 후엔 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일정상 시간이 없어서 그냥 런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황선애 우승에 스포츠광을 자처하는 당시 전두환대통령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1981년 3월31일 ‘노고를 치하한다’는 내용의 축전을 보냈다. 조상호 당시 대한체육회장의 축전이 뒤를 따랐고, 그해 5월14일 당시 이규호문교부장관이 한국체육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황선애에게 장학금으로 금일봉을 전달했다.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에 이르는 카퍼레이드는 당연했다. ‘무개 찝차’에 혼자 서서 길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봉섭 코치는 “당연히 주인공은 황선애였다. 코치로서 나도 지프차 한 대를 배정받아 카퍼레이드를 벌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4월초 싸한 바람을 맞으며 카퍼레이드를 한 탓에 한동안 감기로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거의 ‘황선애 신드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황선애의 시대는 너무 짧았다. 그의 등장은 강렬하고 화려했지만, 그 영광은 한순간에 그쳐 버렸다. 그것은 황선애 개인은 물론 대한배드민턴협회와 지도자 모두의 책임이었다. 갑자기 변방의 한국배드민턴이 국제무대의 각광을 받자 어쩔 줄 모르고 좋아만 했지 ‘마스터플랜’이 전혀 없었다. 선수는 어떻게 관리하고, 밑에서 올라오는 꿈나무들은 어떻게 육성할지 또한 스타 선수들은 어느 대회에 내보내고, 어느 대회에 출전시키지 않을지, 주도면밀한 장기 계획이 없었다. 어찌 보면 시대의 운명이었다. 그 시대는 모두가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살던 시대였다. 결국 그렇게 황선애는 ‘부상의 늪 속을 헤매다’ 끝내 은퇴했다.
황선애의 첫 부상은 1981년 전영오픈 4강전 인도네시아 이바나와의 게임 때 일어났다. 그 이전까진 부상이란 걸 몰랐다. 마룻바닥이 아니라 생소한 코트매트에서 게임하다보니 발바닥이 너덜너덜 헤어지고 허벅지 근육이 늘어났다. 그때 그 작은 부상을 제대로 치료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뒤로 계속 게임을 치르다보니 ‘부상→치료→재발→훈련중단→재기’의 악순환이 됐다.
황선애는 전영오픈을 제패한 그해 7월25일, 미국 산타클라라에서 열린 제1회 월드게임 참가했다. 이게 부상을 악화시키는데 결정타가 됐다.
제1회 월드게임은 종합대회였지만, 배드민턴 입장에서 보면 세계배드민턴을 양분하고 있었던 국제배드민턴연맹(IBF)과 중국이 주도하던 세계배드민턴연맹(WBF)이 통합된 후 처음 만나는 대회였다. 황선애를 비롯하여 중국의 창 아이링, 인도네시아 베라와티, 덴마크 캐펜, 일본 도카이린, 영국 웹스터 등 세계 강호들이 모조리 출전했다. 그리고 IBF의 최강 황선애와 WBF의 최강 창아이링이 결승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황선애는 엄지손가락 인대가 늘어나고 쇄골에 금이 간 상태였다. 도저히 게임을 치를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권할 수는 없어서 마취주사를 맞고 출전을 강행했다. 결국 1-2(7-11, 11-9, 9-11)로 패배. 혼신의 힘을 다해 너무 잘 싸웠지만 계속되는 애매한 판정에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몸이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 심판까지 상대편이었다. 후에 창 아이링은 황선애에게 “그 게임은 네가 이긴 경기”라고 편지를 보내왔다. 어쨌든 현장에서 그 경기를 지켜본 몰린 세계배드민턴연맹회장은 “최고의 명승부”라며 두 선수에게 박수를 보냈다.
황선애는 월드게임 이후 9월부터 엄지손가락을 깁스한 채 거의 4개월 동안 훈련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충분히 쉬었어야 했다. 황선애는 1981년 12월15일 종합선수권대회에 나갔다. 단식은 무리였고 강행숙과 짝을 이뤄 여자복식에 출전, 우승을 차지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엄지손가락이 곪아 터져 고통이 심해졌다. 이때 축구스타 차범근 선수의 부상을 안수기도로 고쳤다는 이천석 목사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기도를 받았다. 황선애는 그 후 상태가 좋아졌다고 느껴 12월 20일부터 가벼운 연습에 들어갔다. 1982년 1월 일본오픈(1.14∼17. 일본고베)에 참가했다. 나름대로 잘 싸웠다. 1차전 일본 하라구치에 11-6, 12-9로 이겼고 2차전 덴마크 소렌센과 3차전 뉴질랜드 벤부세콤을 각각 2-0으로 눌렀다. 하지만 4차전에서 중국의 18세 소녀 리링웨이에 무너져 3위에 머물렀다. 김학석 단장(코치 김의곤)은 “황선애가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아 제 컨디션이 아닌데다 감기까지 걸렸다. 3위도 잘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선애는 “경기란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올해는 많은 국제대회도 있고 뉴델리아시아경기도 있습니다. 다만 중국선수들의 기량은 경계의 대상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여자배드민턴은 랭킹 1위 창아이링, 2위 첸루첸, 3위 수롱을 비롯하여 18세 신예 리링웨이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즐비했다. 남녀 등록 선수만 10만 명이 넘었으며 경기 인구는 자그마치 8000여만 명에 이르렀다.
1982년 3월 한국배드민턴은 1981년에 이어 2번째 유럽원정에 나섰다. 1981년 원정은 여자선수 4명뿐이었으나 이번엔 남자선수 이은구(26세)-박주봉(고3·18세)이 합류했다. 감독 김학석, 남자코치 한성귀, 여자코치 김의곤. 황선애는 이 때까지도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여전히 엄지손가락은 정상이 아니었고, 옛날과 같은 ‘강한 손목과 허리힘을 이용한 호쾌한 스매싱’이 나오지 못했다. 결국 덴마크 오픈(3.16∼20)에서만 김연자와 짝을 이룬 복식에서 3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이은구-박주봉조는 그 대회에서 남자복식 우승을 차지했다. 황선애는 스웨덴 오픈에선 중국의 우디시와 접전 끝에 1-2로 2회전에서 탈락했고, 전영오픈에서도 역시 중국의 송유핑에게 1-2(11-9, 2-11, 0-11)로 2회전 탈락했다.
황선애는 1982년 6월15일 도쿄에서 열린 제1회 한일국가대항배드민턴대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6월28일 종별대회에 출전했다가 허리 부상으로 쓰러져, 한때 화장실 출입도 못했다. 이 후부터 끊임없는 부상이 이어졌다. 발목 같은 경우 곰곰이 세어보니 27번이나 탈이 났다. 은퇴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왼쪽 발목은 제대로 굽혀지지 않는다. 당시 어느 의사는 황선애를 진단해 본 후 “당신 몸은 70대나 마찬가지니 운동을 중단하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만신창이 몸이었다. 1년 정도 푹 쉬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동아일보 1982년 7월 24일 8면 스포츠면에 황선애의 근황이 실렸다. 제목은 ‘병상의 배드민턴 여왕 황선애, 김진호가 부럽다’였다. 42년 전에도 배드민턴 천재가 양궁 선수를 부러워한 것이다.
황선애는 1982년 11월25일 뉴델리아시아경기대회가 다가올 즈음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김포공항에 실려가 비행기를 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선애-강행숙조는 결승전에서 김연자-유상희 조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따냈다. 그게 황선애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뉴델리아시아경기 배드민턴의 금메달은 기대 이상의 성과이다. 지난해 국제대회 4관왕이었던 황선애가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치 못해 협회나 체육회로서도 금메달은 기대만 했었을 뿐이다. 그러나 복식에만 출전한 황선애가 강행숙과 한 조를 이뤄 금메달을 따는 등 이번 아시아 경기에선 금메달과 은메달 1개씩과 동메달 4개를 따냈다. 78년 대회에서 유일한 노메달종목의 쓰라림을 씻어냈다. 그러나 역시 중공의 벽은 두껍다. 단체전 준결승에서 남녀 모두 중공에 완패한 결과는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배드민턴은 레저인구(200만 추산)에 비해 선수는 적은 편(1000여명)이지만 현 대표 중 남자부의 박주봉은 앞으로도 발전이 기대되는 등 남녀 모두 대를 이을 재목은 많은 편이다. 단식 복식 전문선수의 양성은 중공을 겨냥해 절실히 필요하다. -동아일보 1982년 12월 18일자
안세영 계기 삼아 낡은 한국체육 시스템 바꿔야
황선애는 1986년 4월2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세계남녀단체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가 허벅지와 발목을 다쳐 현지에서 다리 전체에 깁스를 한 뒤 귀국했다. 그리고 86서울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끝내 은퇴했다. ‘마취주사 출전-테이핑 출전-부상 완전치료 안하고 출전’ 등이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여자 배드민턴천재 황선애는 무대에서 사라졌다. 황선애는 1986년 9월 은퇴 후 대전여상-대성중-신탄중앙중-법동중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언젠가부터 배드민턴계와 연락이 끊겼다.
그렇다. 황선애 전영오픈 우승 이후 43년, 한국배드민턴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이번 파리올림픽을 계기로 한국배드민턴이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안세영의 충격 폭로가 그 시발점이다. 협회, 코칭스태프, 대한체육회, 언론, 팬들까지 앞다퉈 진실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안세영은 12일 현재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올림픽이 끝난 뒤 밝히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기야 상황은 이제 감정 다툼으로까지 치닫는 모양새이다. 어차피 진실 공방이란 승자가 있을 수 없다. 결국 서로 상처만 입고 끝날 것이다. 본질은 온데 간데 없고, 서로 왜 다투는지도 모르고 끝날 가능성이 크다.
본질은 간단하다. 지난해 항저우아시안게임 결승 부상 이후 하마터면 안세영에게도 ‘황선애 같은 일’이 일어날 뻔했다는 사실이다. 부상 부실 관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안세영은 대표 선수 관리를 협회가 제대로 해달라고 말했다. 또한 협회 운영시스템도 양궁협회처럼 공명하고 투명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협회는 발칵했다. 규정대로 모두, 아니 다른 선수들보다 특별히 더해 줬는데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서비스를 받는 쪽에서는 불편하다는데, 서비스를 제공하는 협회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앞으로도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한국 배드민턴의 대대적인 개혁’이다. 한국체육의 혁신이다. 어떻게 바꿀 것인지 개혁 청사진을 내놓고 국민의 동의를 받으면 된다.
그러려면 왜 40여 년 전에 일어났던 황선애 부상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각 경기단체의 규정 중, 시대에 맞지 않은 낡은 조항은 없는지 등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요즘 MZ세대의 이야기도 겸허하게 들어봐야 한다. 이젠 더 이상 옛날처럼 아픈 몸을 참아가며 대회에 나가는 시대가 아니다. MZ세대는 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정치권도 자료만 내놓으라고 다그칠 게 아니라, 사려깊은 법적 제도적 뒷받침에 힘써야 한다. 애꿎은 협회 직원들만 자료 준비하느라 날밤을 새우며 죽어난다. 결국 이번 ‘안세영 사태’는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나도 그말믿었다가 평생 고생한다...처음 대학에 입학했을때 벽에...큰글씨로 쓸수록 머리는 좋아진다라고 쓰인걸보고 그대로 믿고 너무과하게 잠도 안자고 공부하는라 잠자는걸 잃었다...평생 그것때문에 고생...공부한게 헛게된건 아니지만...한계가 있는걸 너무 몰아 부쳤다....어릴때 어른들이 힘자랑 하지말고 먹기 내기도 하지 말란걸 그때는 몰랐었다...진작 새겨 들었으면 고생안했을걸...
체육계을전체을바뀌어야합니다ᆢ지금도ᆢ2024년도 ᆢ바꿔어야합니다ᆢ욕ᆢ폭련ᆢ등등입니다ᆢ
정치인.법조계,체육계.문화예술 모두 썪었다.
어깨는 쓸수록 강해진다 ㅡ 성근콘 무릅은 쓸수록 강해진다ㅡ배드민트협회장
한계가 있어요...절대 무리하면 안됩니다....
우승보다 중요한게 선수의 건강이다. 협회 너네의 수입을 위해 선수들의 희생을 강요하지마라. 안세영의 용기를 선두로 대대적인 협회의 투명성이 필요하고 안세영과 손흥미을 놓고 비교하면 누가 더 나라의 자랑인지 판단해라. 어디 월드컵프로게임선수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 낫다고 할 수 있냐? 안세영의 용기 칭찬합니다.
어린 선수에게 무거운 짐을 들게 해서는 안된다.. 안세영은 훌륭한 선수이며, 모든 베드민턴 선수들을 위해 총알받이를 자처했다. 용기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낸다.
안세영 이의제기는 금매달보다 더 값진 행동
그냥 대한 체육협회가 모조리 ㄷㄷㄴ 이구먼
요즘 안세영 기사에 베협 댓글부대로 보이는 좀비들이 많이 보인다.참으로 한심하다.세계적 선수가 되면 자기 관리를 위한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협회는 쥐꼬리만큼 지원하고 다른 선수들과 형평 운운한다.그러니 개인 스폰서도 받게 하고 다른 베드민튼 강국의 선수들처럼 광고수익도 받게 해야 한다.베협이 손흥민,김연아급 운운 하는데 안세영도 유럽,인도에서 그런 선수와 동급이상 대우 받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동회회와 저변확대도 중요하지만 엘리트 선수를 죽여서 얻는 이득으로 해서는 안된다.
이후 올바른 선구자가 1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린 후배들이 이렇개 힘들진 않았을텐데... 안선영의 일을 계기로 선수가 맘편히 운동만 할수있는 환경이 되어야한다. 수영 박태환때부터 체육회 횡포가 유명했는데 도데체 고쳐지지가 않네
황선애 선수는 열심히 기독교인으로 샇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상처입은 몸으로도.. 왜 그준의 이야기가 나오지 얺나 기다렸습니다. 배협은 정말 어누 하고 언론도 그렇습니다.
간단한 얘기를 길게도 썼네. 광고로 돈 벌고 싶으니 그만 풀어라. 안그러면 나 부상으로 몸이 계속 아플테니. 난 금메달 땃으니 이제 내 광고 주머니를 차고 싶다. 그래서 협회를 먼저 공격했어 공격은 선빵 기선제압이 중요하잔어 난 스무살 안하무인이야. 집안이 그런 편이야.
베드민턴 협회에서 돈받고 댓글다나보네. 아님 임원이거나...
스무살은 아닌거 같고 ㅋㅋㅋ 협회장 비서인가???
널 낳고 미역국 드신 어머니가 불쌍하다......
김화성 기자를 응원 합니다.
간만에 가자다운 기자가 쓴 글을 읽습니다. 제대로된 스포츠기자가 아직 있군요. 스포츠가 그렇듯 언론도 변해야 할것인데
진짜 오랜만 좋은 기사네요 잫못된 거는 고쳐 나가야지요
오랜만에 필력 있는 기사를 봤네요. 우리나라에 아직 이런 기자가 있었더니
우리나라는 미래를 볼줄 모르는 나라....5백년조선보면서도 못느끼나....하긴 하도 세뇌를 많이 당해서 몰라 국민들이...불쌍한 황선애 안세영...그외에도 숱하게 사라져간 이름모를 꿈나무들이 불쌍해...선수생명 끝나든말든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라는 사고방식으로 뭘 한다고....에혀
한선수가 모든대회 참가하지말고 돌아가면서 선수들 기용하고 부상있는선수는 치료우선으로해야ㆍ
우리나라는 역사를 중요시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도 못하는 민족같아 보인다.
근성&열정은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