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을 갓 넘긴 아이를 안고 진료실로 들어오는 아빠는 화가 나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엄마는 사색이다. 무슨 죄라도 지은 듯 남편 앞에서 꼼짝 못하고 있었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전업주부인 엄마가 집 안에서 캑캑거리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고, 아이가 아무 것도 먹지 않으려 하면서 침을 흘리고 있어 병원에 데려 갔는데 엑스레이를 촬영해보니 목 부위에 1cm 가량의 동그랗게 생긴 금속 이물질이 발견된 것이다.
다급하게 직장에 있는 남편을 불러 상급 병원으로 데려온 것이다. “아니 뭐든지 입에 넣는 애인줄 알면서 도대체 방 청소는 하고 있던 거야?” 아빠는 여전히 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이물질의 모양이 흐릿한 게 무언지 잘 모르겠고 아이가 증상이 있어 바로 내시경으로 이물질을 제거하기로 했다. 이물질은 입에서 식도로 연결되는 부위에서 바로 발견되었고 쉽게 빼낼 수 있었다.
그런데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원형의 얇은 철망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보호자를 불렀는데 엄마만 내시경실로 들어왔다. “혹시 이게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내 질문에 그 이물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갸우뚱 하던 엄마는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찰나의 순간에 엄마의 표정이 밝아짐을 느꼈다. “아빠 이어폰?” 아하, 이어폰을 감싸는 그물 같은 망이었던 것이다.
엄마가 연신 고마워하며 나간 뒤 간호사로부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내시경실 밖에서 엄마가 고개 숙인 아빠 앞에서 일장훈계를 하고 있었다나 뭐라나.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언제나 누구나 다 똑같다.
사실 잘잘못을 따지자면 이어폰을 아무렇게나 놓아둔 아빠와 바닥에 있던 그것을 챙기지 못한 엄마 모두에게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분명하니 비율로는 7 대 3 정도로 아빠의 책임이 크다고나 할까? 아마도 집에 돌아간 부부는 한 번 더 싸울 것 같은데 7을 잘못한 아빠가 3 또한 잘못이라며 엄마를 긁어 놓을 확률이 높다.
매스컴에서 늘 경험하듯이 죄인으로 몰리면 꼭 ‘다른 이들도 그러는데 왜 나만’이라며 항의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된다.
유명한 심리학 실험에 따르면 부부가 집안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각자 몇 퍼센트를 맡고 있냐고 물었는데 두 사람이 일한 양을 합했더니 거의 대부분 100퍼센트가 넘게 나왔다.
자기가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둘 다 맞는 말을 하고 있다. 각자 설거지도 많이 했고 슈퍼마켓에도 자주 갔으며 육아도 열심히 해왔음은 분명해 보인다. 단지 ‘많음’의 정의가 서로 달랐을 뿐.
아마도 ‘남 탓’만큼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행동도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그 결과가 좋으면 ‘내 탓’이고 나쁘면 ‘남 탓’이 되니 세상의 모든 일은 ‘내 탓’ 아니면 ‘남 탓’이다. 잘못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이 자신을 떳떳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요인이 된다.
이 부담은 아무리 작은 일이었어도 사람에게는 확실히 피하고 싶은 ‘소확혐(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이다.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바르지는 않을 것이라서 그렇다. 알면서 자신만 슬쩍 빠지는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사실 모르고 ‘남 탓’만 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정치, 경제, 사회를 논하다 보면 늘 둘로 나뉘어 다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세상에는 ‘경합하는 진실(Competing truth)’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진실》의 저자 헥터 맥도날드의 언급대로 ‘양쪽 다 진실’이다. 3도 진실이고 7도 당연히 진실이겠지만, 3보다 못함을 가지고서 자신에게 혹은 자기 편에게 유리하도록 호도하는 것과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한 채 ‘남 탓’을 먼저 내세우는 옹졸함이 문제인 것이다. 이쯤 되면 ‘못된’ 게 아니라 ‘못난’ 것이리라.
‘남 탓’ 전에 ‘내 탓’을 할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이 필요하다. 잊지 말자. 성숙한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인 ‘비판적 사고’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주장에 잘못이 없는지 엄격하게 살펴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