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혈액 속 혈소판이 많으면 피가 더 잘 멎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지나치게 많아지면 오히려 혈관 안에서 피가 굳어 혈전이 생기거나, 반대로 출혈 위험이 커질 수 있다. ‘본태성혈소판증가증’(essential thrombocythemia·ET)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질환을 앓는 환자들에게 약 30년 만에 새로운 치료 선택지가 생겼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8월 31일(현지시간) 대만 바이오제약사 파마에센시아(PharmaEssentia)의 ‘베스레미(BESREMi·성분명 로페그인터페론 알파-2b-njft)’를 성인 본태성혈소판증가증 치료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적응증을 확대했다.
베스레미는 파마에센시아가 개발·생산하는 장기지속형 인터페론 제제다. 미국에서는 2021년부터 진성적혈구증가증 치료제로 사용돼 왔다.
이번 허가 근거가 된 글로벌 3상 임상시험에는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혈액내과 이성은 교수도 참여했다. 특히 기존 약이 잘 듣지 않거나 부작용 때문에 치료를 이어가기 어려웠던 환자에게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혈소판, 많다고 좋은 게 아니다⋯혈전·출혈 위험 함께
본태성혈소판증가증은 피를 만드는 골수에서 혈소판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생기는 만성 골수증식성 종양이다. 혈액암의 한 종류로 분류된다.
혈소판은 상처가 났을 때 서로 엉겨 붙어 피를 멎게 한다. 그러나 너무 많으면 혈관 안에서 원치 않는 혈전이 만들어질 수 있다. 혈전이 뇌혈관을 막으면 뇌졸중, 심장혈관을 막으면 심근경색으로 이어질 수 있다. 혈소판 수치가 매우 높은 일부 환자는 오히려 출혈 위험도 커진다.
그렇다고 모든 환자가 혈소판을 낮추는 약을 먹는 것은 아니다. 나이와 과거 혈전 발생 여부, 유전자 변이 등을 따져 혈전 위험이 높은 환자를 중심으로 혈구 수를 낮추는 치료를 한다.
대표적인 1차 치료제가 ‘하이드록시유레아’다. 하지만 일부 환자는 약을 써도 충분한 효과를 보지 못하거나 부작용 때문에 계속 복용하기 어렵다. SURPASS-ET 연구진은 이런 환자가 약 3분의 1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때 아나그렐리드 같은 다른 약을 고려하지만 치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베스레미가 추가되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몸의 면역반응에 관여하는 ‘인터페론’이 오래 작용하도록 만든 주사제로, 이번 승인으로 치료 범위가 진성적혈구증가증에서 본태성혈소판증가증까지 확대됐다.
본태성혈소판증가증 치료제로는 아나그렐리드가 1997년 FDA 승인을 받은 이후 약 30년 동안 새로운 승인 치료제가 나오지 않았다.
기존 약 안 듣던 174명 비교⋯37.4%서 반응 지속
FDA 허가의 핵심 근거는 글로벌 3상 임상시험 ‘SURPASS-ET’다.
한국을 포함해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등 8개 국가·지역 55개 의료기관에서 진행됐다.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이성은 교수와 대구가톨릭대병원 배성화 교수도 공동 연구자로 참여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랜싯 혈액학(Lancet Haematology)》에 발표됐다.
시험에는 본태성혈소판증가증 환자 174명이 참여했다. 모두 혈전이나 출혈 위험이 높았고, 하이드록시유레아가 잘 듣지 않거나 부작용 때문에 계속 쓰기 어려운 환자들이었다.
연구진은 91명에게 베스레미를, 83명에게 아나그렐리드를 투여했다.
효과는 혈소판 수치 하나만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혈소판을 비롯한 혈구 수가 적정 수준으로 조절됐는지, 비장이 더 커지지 않았는지, 혈전이나 출혈이 생기지 않았는지를 함께 살폈다.
한때 좋아졌다 다시 나빠지는 경우도 가려냈다. 치료 9개월과 12개월 두 시점에서 모두 효과가 유지돼야 ‘지속적인 치료반응’으로 인정했다.
FDA가 허가 심사에 사용한 분석에서 이 기준을 충족한 환자는 베스레미군 37.4%, 아나그렐리드군 3.6%였다.
즉 혈소판 수치만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혈액검사 결과가 안정되고 비장 상태가 나빠지지 않으면서, 혈전이나 출혈도 생기지 않는 상태가 일정 기간 이어졌는지를 종합해 평가한 결과다.
앞서 논문에 발표된 분석에서는 반응률이 베스레미 43%, 아나그렐리드 6%로 보고됐다. FDA는 허가 심사 때 적용한 분석 방식에 따라 37.4%와 3.6%를 제시했다. 이번 승인과 관련해서는 FDA 공식 수치를 기준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먹는 약과 다른 투약법⋯유지치료 땐 2주에 한 번 주사
투약 방식도 기존 약과 다르다.
베스레미는 먹는 약이 아니라 피부 아래에 맞는 피하주사제다. 처음 250마이크로그램(μg)을 투여하고 2주 뒤 350μg, 4주째부터 500μg으로 늘린다. 이후 환자가 약을 잘 견디면 2주에 한 번 투여한다. 상태에 따라 용량은 조절할 수 있다.
이번 임상에서 비교한 아나그렐리드는 성인에서 보통 하루 2~4차례 복용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1차 치료제로 널리 쓰이는 하이드록시유레아 역시 매일 복용하는 경구약이다. 베스레미는 유지치료에 들어가면 2주 간격으로 주사한다는 차이가 있다.
다만 투약 횟수만으로 어느 약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혈전 위험과 이전 치료 효과, 부작용, 동반질환, 함께 복용하는 약 등을 따져 환자에게 맞는 치료를 선택해야 한다.
승인은 성인 전체⋯모든 환자에게 더 낫다는 뜻 아냐
이번 FDA 승인은 성인 본태성혈소판증가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특정 유전자 변이가 있어야 하거나 반드시 이전 치료에 실패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승인 근거가 된 SURPASS-ET의 환자군은 더 좁다. 혈전이나 출혈 위험이 높고, 하이드록시유레아가 잘 듣지 않거나 부작용 때문에 계속 쓸 수 없었던 환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번 연구만으로 새로 진단받은 모든 환자에게 베스레미가 기존 치료제보다 더 낫다고 볼 수는 없다.
부작용도 살펴야 한다. FDA가 밝힌 흔한 이상반응에는 간효소 수치 상승, 빈혈, 발열, 세균 감염, 가려움증, 체중 감소 등이 있다. 인터페론 계열 약물은 일부 환자에서 심각한 신경정신계 이상이나 자가면역질환, 감염 등을 일으키거나 기존 질환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