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근경색을 겪은 환자가 오랫동안 복용하는 약 가운데 하나가 ‘베타차단제’다. 심박수와 심장 수축력을 낮춰 심장의 부담을 덜어주는 약이다.
그런데 스텐트 시술을 비롯한 심근경색 치료가 발전하면서 오래된 치료 관행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치료 뒤 심장 상태가 안정된 환자도 베타차단제를 계속 먹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 연구진이 양국에서 각각 진행한 대규모 무작위 임상시험을 합쳐 분석한 결과, 심부전이 없고 심장 기능이 일정 수준 유지된 환자는 베타차단제를 중단해도 계속 복용한 환자보다 예후가 나빠지지 않았다.
삼성서울병원 순환기내과 한주용·최기홍 교수와 임상역학연구센터 강단비 교수 연구팀은 프랑스 파리공공의료원(AP-HP) 산하 소르본대 피티에-살페트리에르병원 조안 실뱅 교수팀과 공동으로 이 같은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랜싯(The Lancet)》에 발표했다고 31일 밝혔다. 파리공공의료원은 소르본대 등 대학병원 그룹과 협력하며 38개 병원을 둔 유럽 최대 규모 병원 네트워크다.
한국·프랑스 환자 6238명 한데 모아 분석
이번 연구에는 한국의 ‘SMART-DECISION’과 프랑스의 ‘ABYSS’ 임상시험 자료가 쓰였다.
SMART-DECISION은 삼성서울병원 연구팀이 주도해 한국 25개 의료기관에서 진행했다. ABYSS에는 프랑스 49개 의료기관이 참여했다. 두 연구 모두 심근경색을 겪은 뒤 상태가 안정된 환자에게 베타차단제를 계속 써야 하는지를 살폈다.
두 연구를 합친 환자는 6238명이다. 모두 심근경색이 발생한 지 최소 6개월이 지났고, 베타차단제를 반드시 써야 할 다른 이유가 없었다. 심부전도 없었으며 좌심실박출률(LVEF)은 40% 이상이었다. 좌심실박출률은 심장이 수축할 때 좌심실에 있던 혈액을 얼마나 내보내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심장의 펌프 기능을 가늠할 때 주로 쓴다.
연구진은 베타차단제를 끊은 3092명과 계속 복용한 3146명을 약 3년간 추적했다. 사망과 심근경색, 뇌졸중, 심혈관질환 관련 입원을 한데 묶어 비교한 결과 중단군에서는 17.2%, 지속군에서는 15.9%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 통계적으로 뚜렷한 차이는 없었다.
사망과 심근경색 또는 심부전 입원을 묶어 다시 살펴봐도 결과는 거의 같았다. 중단군 6.5%, 지속군 6.4%였다.
심근경색 치료가 끝난 뒤 상태가 안정된 일부 환자라면 베타차단제를 계속 복용해야 하는지 다시 따져볼 수 있다는 근거가 하나 더 쌓인 셈이다.
최기홍 교수는 “과거에는 심근경색 치료가 쉽지 않았던 탓에 베타차단제를 장기간 복용하는 것이 중요했다”며 “최근에는 스텐트 등 치료법이 개선되면서 심근경색 후 심장 기능이 회복해 안정적으로 지내는 환자가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환자에게 불필요한 약을 중단할 수 있다면 약을 계속 먹어야 하는 부담도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1960년대부터 쓴 약⋯치료 기술 발전하면서 장기복용 필요성 따져
베타차단제는 1960년대부터 임상에서 쓰이기 시작한 오래된 심혈관계 약물이다. 심박수와 심장 수축력을 낮춰 심장이 필요로 하는 산소량을 줄인다. 심근경색뿐 아니라 협심증과 부정맥, 고혈압, 심부전 치료에도 쓰인다.
약의 효용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심장 수축기능이 떨어져 있거나 심부전이 있는 환자, 부정맥이나 협심증 등 다른 이유로 베타차단제가 필요한 환자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치료제다.
달라진 것은 심근경색 치료 환경이다. 과거 베타차단제의 효과를 확인한 주요 연구들은 지금처럼 막힌 관상동맥을 스텐트로 빠르게 뚫고 항혈소판제와 스타틴 등을 적극적으로 쓰기 전에 이뤄졌다.
치료 성적이 좋아지면서 심장 기능이 잘 유지되는 환자까지 베타차단제를 오랫동안 먹어야 하는지를 다시 따져보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연구, 3월 NEJM 실려⋯25개 기관 2540명 참여
이번 공동 연구의 한 축인 SMART-DECISION은 삼성서울병원 연구팀이 주도했다.
한주용 교수는 2021년 보건복지부 ‘환자중심 의료기술 최적화 연구사업단’의 국가지원 과제로 선정된 뒤 심근경색연구회와 함께 약 5년에 걸쳐 연구를 진행했다.
한국 25개 기관에서 심근경색 이후 베타차단제를 최소 1년 이상 복용한 안정된 환자 2540명을 모집했다. 이후 약을 끊는 군과 계속 복용하는 군으로 무작위 배정해 예후를 비교했다.
사망과 재발성 심근경색, 심부전 입원을 합친 주요 사건의 4년 추정 발생률은 중단군 7.2%, 지속군 9.0%였다. 중단군의 결과가 지속군보다 임상적으로 뒤지지 않는다는 ‘비열등성’ 기준을 충족했다.
이 연구는 지난 3월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NEJM)》에 실렸다. 미국심장학회(ACC)도 같은 달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연례학술대회에서 이 연구를 주요 최신 임상연구(Late-Breaking Clinical Trial)로 소개했다.
프랑스 ABYSS 연구는 앞서 조금 다른 결과를 냈다.
프랑스 49개 기관에서 369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이 연구는 2024년 NEJM에 발표됐다. 당시 주요 사건은 중단군 23.8%, 지속군 21.1%에서 발생했다.
연구진이 미리 정해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서, 베타차단제를 끊어도 계속 복용하는 것보다 나쁘지 않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이번 한·프 공동 연구는 이렇게 결론이 엇갈렸던 두 임상시험의 환자 자료를 한데 모아 다시 분석한 것이다. 인종과 의료 환경이 다른 두 나라 환자 6238명을 함께 살펴봐도 베타차단제를 끊은 환자에게서 주요 임상 사건이 뚜렷하게 늘지는 않았다.
NEJM 이어 Lancet⋯진료지침 논의에도 영향 줄까
유럽심장학회(ESC)도 이번 연구를 주목했다.
지난 30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ESC Congress 2026에서 조안 실뱅 교수가 SMART-DECISION과 ABYSS 통합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삼성서울병원 연구진이 주도한 한국 연구가 지난 3월 NEJM에 실린 데 이어, 이번 한·프 공동 연구는 Lancet에 발표됐다. 심근경색 뒤 심장 기능이 안정된 환자의 베타차단제 장기 복용 기준을 다시 논의할 근거가 잇따라 쌓이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심장학계에서는 심근경색 뒤 심장 기능이 잘 유지되는 환자에게 베타차단제를 얼마나 오래 써야 할지를 놓고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미국 진료지침도 이런 환자의 적정 복용 기간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다만 이번 결과를 모든 심근경색 환자에게 적용해선 안 된다.
심부전이 있거나 심장 수축기능이 크게 떨어진 환자, 부정맥이나 협심증 등 베타차단제를 써야 할 다른 이유가 있는 환자는 이번 연구 대상과 다르다.
연구 결과만 보고 환자가 스스로 약을 끊어서도 안 된다. 베타차단제를 갑자기 중단하면 상태가 악화할 수 있어 심장 기능과 혈압, 맥박, 동반 질환 등을 살핀 뒤 담당 의사와 중단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한주용 교수는 “이번 대규모 국제 공동 연구를 통해 심근경색 후 환자가 안정적이라면 베타차단제 복용을 중단할 수 있다는 치료 기준을 마련하는 데 한 발 더 다가섰다”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에 따라 꼭 필요한 환자에게만 약을 쓰는 문화를 만드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