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대한민국을 침략한 6·25전쟁 발발이 올해로 76주년을 맞았다. 당시 16개국이 한국에 전투부대를 보내 국군과 함께 피를 흘렸으며, 스웨덴·인도·덴마크·노르웨이·이탈리아·서독(정전 직후 도착) 등 6개 우방국의 의료지원단도 함께 활동했다. 6·25 76주년을 맞아 수도 서울과 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남아 있는 의료지원단의 흔적을 살펴본다.
의료지원단은 전시에는 물론 전쟁 직후까지 부상군인은 물론 민간인까지 돌봤다. 한국 의료진에 의술을 전수했고, 의사 수련 기관인 국립의료원도 설립했다. 특히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의 스칸디나비아(노르딕) 3국의 의료지원단은 헌신적인 활동으로 한국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 세 나라는 유엔한국부흥위원회(UNKRA) 및 한국 정부와 3자 협력으로 한국에 의사 수련을 담당할 ‘스칸디나비아 교육병원’을 설립했다. 1958년 10월 1일 을지로 6가 서울시립시민병원 자리에 개원해 그해 11월 28일 진료를 시작했다. 현재의 국립중앙의료원이 바로 그 병원이다.
의료지원단이 한국에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으로 붕괴된 의료체계를 복구하고 의료 인력을 수련시키는 시스템까지 구축한 것이다. 당장 배를 채울 물고기를 나눠주는 수준을 넘어 강과 바다에서 이를 잡을 그물과 낚싯대를 제공하고 잡는 방법까지 전수해준 셈이다.

얼마 전 수리를 거쳐 지금도 같은 위치에서 환자를 맞고 있는 국립의료원은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의 스칸디나비아 3개국이 6·25전쟁 중 한국민을 지원한 인도주의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이들 3개국 요원들은 서로 언어(약간 다르지만 통역 없이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문화·역사가 통하기 때문에 협업의 시너지를 잘 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국립의료원 인근에 바이킹 클럽이라는 식당을 운영했는데, 이 클럽은 ‘한국 최초의 뷔페 식당’으로 불린다. 의료지원뿐 아니라 스칸디나비아의 인도주의 정신과 음식문화까지 한반도에 소개한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스웨덴을 제외한 덴마크·노르웨이는 독일에 점령당해 고초를 당한 경험도 공유한다.

스웨덴은 6·25전쟁 초인 1950년 9월부터 정전이 된 지 거의 4년이 지난 1957년 4월까지 부산에서 스웨덴적십자야전병원(SRCFH)을 운영했다. 1953년 7월 정전 뒤에는 이름을 부산스웨덴병원으로 바꾸고 전상자 재활과 민간인 진료에 주력했다. 스웨덴 병원은 주로 서면 부산상고 자리에 터를 잡고 환자를 진료했다. 1955년 5월 이후 남구 대연동 국립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 자리로 옮겼다가 1957년 철수했다.
부산상고는 노무현 대통령이 졸업한 부산의 명문 상업고교다. 현재는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옮겨 인문계인 개성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부산상고 옛부지는 롯데그룹에 팔려 현재 백화점과 호텔이 들어서 있다. 그 모퉁이에 스웨덴 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스웨덴은 한 번에 170명의 의료진을 파견했으며, 여러 차례 교대하면서 연인원 1124명이 근무했다. 초기에는 200병상을 운영하다가 400병상으로 늘렸으며, 가장 많을 때는 600병상을 가동했다. 후송된 부상병 외에 부산 주민과 피란민을 비롯한 민간인도 많이 진료했다. 한국인 의료진에 의료기술도 전수했다.
스웨덴 병원은 부산 사람들은 스웨덴의 한자 이름을 따서 ‘서전(瑞典) 병원’으로 불렀다. 1950~73년 재위한 구스타프 6세 아돌프 국왕이 왕세자 시절인 1926년 조선을 방문했을 때 경주 고분 발굴을 참관했는데 마침 봉황 장식의 금관이 출토됐다. 이를 기려 이 고분에 서전(瑞典)과 봉황(鳳凰)에서 한자씩 따서 서봉(瑞鳳)총이란 이름을 붙였다. 왕세자였던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국왕으로 즉위한 1950년 전쟁이 발발한 한국에 누구보다 먼저 의료지원단을 파견했다. 스웨덴이 그때는 물론 2024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할 때까지 중립국이었음을 생각하면 당시 의료지원단 파견은 큰 결단이었다.
덴마크 의료지원단은 육상에 병원을 운영하지 않았다. 왕실요트를 개조한 8500t급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를 파견해 선상 병원을 운영했다. 1951년 3월부터 1953년 8월까지 활동했는데, 처음에 부산항에 머물다 1952년 11월 인천항으로 이동했다. 한 번에 100명이 파견돼 근무했으며, 여러 차례 교대하며 연인원 630명이 한국으로 파견됐다. 전쟁 기간 2차례에 걸쳐 덴마크로 왕복항해를 했다. 본국을 방문해 의료진을 교체하고 장비와 보급품을 보충했다. 중간 여러 항구에 기항하면서 파병국인 에티오피아·튀르키에·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의 부상병을 본국으로 귀환시켰다.
노르웨이는 1951년 6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노르웨이육군이동외과병원(NORMASH)을 의정부·동두천 등지에서 운영했다. 한꺼번에 109명이 근무했으며 인력이 6개월마다 교체돼 연인원 623명이 파견됐다. 3명의 순직자를 냈다. 서울 북방에 주둔한 미군 1군단 병력의 진료를 담당했다. 미군 1군단 예하에는 국군 1사단과 미군 24보병사단과 1기병사단이 배속돼 있었다. 한국인 민간인도 진료했다. 전쟁으로 무너진 의료체계 복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6·25전쟁 의료지원단의 흔적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3-12(합동 30번지)에 있는 주한 프랑스대사관이다. 이 대사관 건물은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로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인 김중업(1922∼1988) 선생이 설계했다. 1963년 완공된 대사관 건물 지붕의 날렵한 곡선은 한국 전통 가옥의 처마선을 형상화한 것이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여러 차례 증·개축되면서 원래 형태가 변형됐다가 최근 5년 간의 원형 복원 작업을 거쳐 2023년 4월 재개관했다.
신축 ‘몽클라르관’과 입구의 갤러리동인 ‘장루이관’은 6·25전쟁 프랑스 참전용사들에게 헌정됐다. 몽클라르관은 대사관 직원이 근무하는 10층 건물로 꼭대기층에 대사 집무실이 있다. 장루이관은 대사관 입구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몽클라르관은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병된 프랑스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계급을 중장에서 중령으로 낮춰 참전한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 1892∼1964) 장군의 이름을 땄다. 본명이 라울 마그랭베르느레(Raoul Magrin-Vernerey)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샤를 드골 장군 휘하의 자유프랑스군 소속으로 나치에 저항할 당시 사용했던 가명인 몽클라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장루이관’은 6·25전쟁에 참전 중 지뢰밭에 갇힌 한국군 부상병을 구하다 산화한 프랑스군 군의관 쥘 장루이(Jules Jean-Louis, 1917∼1951) 소령의 이름을 땄다.

장루이 소령은 1916년 프랑스 동남부 앙티브 태생으로 파리의 발드그라스 병원의 군의학교를 마치고 군의관으로 임관했다. 2차대전 당시인 1940년 독일군의 포로가 됐지만 수용소에서 부상병을 헌신적으로 돌본 공로로 프랑스군 십자훈장을 수훈했다. 전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근무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11월 26일 프랑스대대와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미군과 프랑스군 등이 포위된 상태에서 중공군을 격파한 1951년 2월 양평 지평리 전투에 이동병원 의무대장으로서 참전했다. 지평리 전투는 연합군이 남진하는 중공군을 처음으로 격파해 진격을 저지하면서 6·25전쟁의 향방을 바꿔놓은 전투다.
장루이 소령은 그해 5월 8일 강원도 홍천의 프랑스군 이동병원에서 한국군 장병 두 명이 지뢰를 밟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나가 이들을 구했지만 복귀하려는 순간 다른 지뢰가 폭발하면서 전사했다.

프랑스 정부는 장루이 소령에게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추서했다. 한국에선 그가 전사한 곳에서 멀지 않은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55번지의 44번 국도변에 한불수교 100주년과 장루이 소령 전사 35주기인 1986년에 동상이 건립됐다. 장루이 소령의 동상은 자신이 전사한 홍천의 마을을 응시하고 있다. 한국에 서 있는 유일한 프랑스인 동상이자, 인천 자유공원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동상과 함께 한국에 둘밖에 없는 6·25전쟁 참전 외국군인 동상이다.
장루이 소령의 동상이 선 지 40년이 지난 올해 한국과 프랑스는 수교 140주년을 맞았다. 구한말이던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서로 외교관계를 맺은 지 140년이 됐다. 이를 기념해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4월 방한했으며, 6월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 초청받았다. 전후 끊임없는 노력으로 경제적 위상과 강력한 국방력,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보한 한국은 멀지 않은 장래에 G7에 정식회원국으로 초청받아 이 조직을 G8으로 바꿔놓은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현재 한국은 경제적 번영과 함께 높은 국제적 위상을 누리고 있다. 한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적에게 맞서 싸운 국민은 물론 전투부대와 의료지원단을 보내준 우방국들의 헌신과 희생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든 기초의 하나일 것이다. 호국의 달 6월은 그분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