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변에 일흔이 넘었는데 예전보다 말이 더 또렷해진 어른이 한 명쯤 있지 않나. 팔십 가까이 돼서도 동네를 빠른 속도로 걷는 노인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노익장이군" ,"저분은 특별한 경우"라고 넘겼다면 국제학술지 《지리아트릭스(Geriatrics)》에 실린 연구 결과는 통념을 뒤흔든다. 65세 이상의 절반 가까이는 최대 12년 추적에서 인지기능이나 보행속도 중 하나 이상이 오히려 좋아졌다. 다만 지금껏 평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45%가 좋아졌는데…왜 평균에 가려졌나
미국 예일대 보건대학원 역학과·심리학과 교수인 베카 레비 박사팀의 연구 결과다. 레비 교수는 저서 《나이가 든다는 착각》(원제: Breaking the Age Code)으로 한국에도 알려졌다.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건강의 관계를 천착해온 노화심리학 분야 학자이다.
연구팀이 활용한 자료는 미국 국립노화연구소와 미시간대학교가 연방정부 지원으로 운영하는 종단조사 '건강과 은퇴 연구'다. 연구팀이 직접 모집한 표본이 아닌, 50세 이상 미국인 약 2만 명을 2년마다 추적해온 독립 데이터다. 이 조사에서 65세 이상 1만1000여 명의 인지기능 점수와 보행속도 변화를 최대 12년간 분석했다.
결과는 상식과 딴판이었다. 45%가 인지기능이나 보행속도 중 하나 이상에서 개선됐다. 연구팀은 기준시점과 최대 12년 뒤 마지막 측정치를 비교해, 이 두 영역 중 하나라도 개선을 보인 사람을 따로 분류했다. 12년 내내 계속 좋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시작과 끝을 비교했을 때 더 나아진 사람들이 더 나아진 사람이 45%라는 것이다.
노화 인식이 기능 변화와 연결됐다
그간 왜 이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기존 연구들은 노인의 인지·신체 기능을 '감소'와 '감소하지 않음', 딱 두 범주로만 측정해왔다. 개선이란 가능성을 처음부터 항목에 넣지 않은 것이다.
전체 집단의 평균으로 보면 감소가 두드러지지만, 개인별 궤적을 들여다보면 다른 이야기가 드러난다. 이번에 처음으로 '좋아지는 사람'을 잡아낼 방식을 집어넣자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드러났다.
연구팀이 주목한 요인은 노화에 대한 인식이었다. 연구 참가 당시 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수록 인지기능과 보행속도가 좋아질 가능성도 높게 나타났다. 조정모델에서 인지기능 개선의 오즈비(두 집단 간 발생 가능성의 비율)는 1.04, 보행속도 개선의 오즈비는 1.09였다. 1.0이 기준이므로 수치 자체는 크지 않지만, 나이·성별·만성질환·우울 증상을 모두 빼고 봐도 이 연관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왜 생각이 기능과 연결되는가
레비 교수의 선행 연구들은 이런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해왔다.
우선 행동 경로다. 노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나는 아직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기대하기에 운동을 더 하고, 필요한 진료를 미루지 않으며, 식습관을 챙길 가능성이 크다.
다른 하나는 생물학적 경로다. 30년치 코르티솔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서 긍정적 노화 인식을 가진 노인은 그렇지 않은 노인보다 스트레스 호르몬(코르티솔) 수치가 낮게 유지됐다. 코르티솔이 만성적으로 높으면 인지기능과 신체기능 모두 손상된다.
알츠하이머 고위험 유전자(APOE ε4)를 가진 사람 중에서도 노화를 긍정적으로 본 사람은 부정적으로 본 사람보다 치매 발생 위험이 49.8% 낮았다. 나이 듦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실제 건강 궤적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나이 탓'이라는 말부터 줄여야 하는 이유
그렇다면 노화에 대한 기존 인식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레비 교수는 저서 《나이가 든다는 착각》에서 일상에서 당장 해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첫째, 미디어 속 노인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보는 눈을 기르는 것이다. 노인을 느리고 쇠약하게 묘사하는 드라마, 광고, SNS 밈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웃고 넘기다 보면 부정적 인식이 조금씩 강화된다. 레비 교수는 "보는 드라마, 읽는 글, 웃고 넘기는 농담들이 모두 나이 듦의 각본이 된다"고 말한다. 아예 안 보는 게 아니라 "아, 이게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는구나"라고 의식적으로 알아채는 것이 출발점이다. 활기차게 나이 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면 나이 듦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미리 한국교통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등 연구진이 한국 65세 이상 노인 600명의 자료를 분석, 미디어 속 부정적 노인 이미지 노출이 노화 고정관념 및 노화불안과 관련된다는 결과를 국제학술지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s)》에 발표한 바 있다.
둘째, "나이 들어서 그런가봐"라는 말을 입에서 지우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잊었을 때 곧바로 나이 탓으로 돌리는 순간, 나이 들어 쇠퇴하는 게 당연하다고 체념하게 된다. 레비 교수는 대신 "요즘 바빠서 그랬지",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랬지"로 원인을 찾으라고 권한다. 작은 말버릇이 인식을 바꾼다.
셋째, 건강하게 나이 든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다. 거창한 유명인이 아니어도 된다. 동네 어른이든, 가족 중 한 명이든 "저 나이에도 저렇게 살 수 있구나"를 눈으로 보는 경험이 기대를 바꾼다.
물론 이번 연구는 관찰 자료 분석의 한계상 인과관계를 단정하기 어렵다. 통제하지 못한 다른 변수의 가능성도 남는다.
다만 레비 교수가 주목하는 것은 한계가 아니다. 가능성이다. 나이에 대한 편견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이 아니라 사회가 심어준 것이다. 노화에 관한 고정관념 역시 다시 쓸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