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태의 종 이야기(41)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 소개한 콜럼버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그 일을 처음으로 생각해 내는 것은 어렵다’고 할 때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귀국한 후, 영웅이 되었다. 환호 속에 자주 파티에 초대를 받게 된다.
그러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어느 날 콜럼버스가 귀족들의 파티에 초대되어 자기가 발견한 신대륙에 대하여 연설을 하자, 한 사람이 크게 빈정거렸다. “대서양을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여 새 섬을 발견한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까? 당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얼굴이 상기된 콜럼버스는 탁자 위에 놓인 달걀을 집어 들고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여기 이 달걀을 탁자 위에 세울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시도해 보았으나,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무도 못합니까? 그럼 내가 해 보겠습니다.” 그는 달걀 끝을 탁자에 쳐서 껍질을 깨뜨렸다. 그리고는 깨어진 쪽을 밑으로 하여 쉽게 달걀을 세웠다. “남이 하는 것을 따라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처음으로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의 탐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은 콜럼버스가 보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상륙하는 모습인 ‘콜럼버스의 상륙’이라는 어린이용 장난감이다. 앞쪽에 줄을 묶어 장난감을 끌면 바퀴가 굴러가며 위쪽의 종을 연속해서 처서 소리를 내는 금빛 도금 금속제품이다. 길이 19cm, 폭 9cm의 크기이고, 아래 부분에 1893년 10월31일 발명특허 등록이라는 문구가 있다. 미국인은 콜럼버스를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한 은인이라 생각하고 있고, 어린이들에게도 콜럼버스의 탐험정신을 전해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종 장난감도 그와 같은 교육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Gong & Gong회사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 4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하였다. 우리나라가 역사상 최초로 참가했던 국제박람회인 189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서 처음 판매되었다. 보트 위에는 4명의 사람이 항해를 하고 있고, 보트를 지휘하는 콜럼버스는 바깥으로 분리할 수 있다.

리스본에는 대서양으로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선장들과 미지의 세계에 대해 도전하고자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그는 동생들과 지도를 제작하며 독학으로 에스파냐어를 공부하였다. 선박 조종법을 익혀 북대서양의 아이슬란드와 같은 도서 국가로 항해를 한 기록도 있다. 그는 1478년 부유한 포르투갈 선장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유품인 항해 지도와 선장 일지 등을 물려받았다. 거기에는 대서양의 바람 상태를 비롯한 중요한 항해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로써 평소에 꿈꾸던 동양으로 향하는 항해를 위한 필요조건을 모두 갖추게 된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가장 먼 땅은 중국, 인도, 그리고 일본이었다. 그곳을 비단과 향료, 그리고 황금과 보물이 가득한 꿈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머나먼 실크로드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온 동양의 물품들은 매우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으므로, 낙타 대신에 배로 동양으로 가는 바다의 지름길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 콜럼버스도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포르투갈의 왕에게 인도로 가는 탐험 항해를 후원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에스파냐로 향했다.

그의 항해는 기독교의 전도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보다는 인도와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각종 향신료와 같은 재물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총 4차례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항해를 떠났다. 첫 번째 항해는 1492년 8월 3일 출발하여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의 섬에 도착하였고, 이 섬을 ‘구세주의 섬’이라는 뜻의 ‘산살바도르’로 명명하였다. 그리고는 쿠바와 히스파니올라(현재의 아이티)에 까지 도달하였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인 ‘인디오’라고 불렀고 그곳을 일본이나 중국의 해변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황제인 ‘그레이트 칸’과 금은보화를 찾으러 돌아 다녔다고 한다. 탐험 도중에 산타마리아호가 파손되자, 한 섬에 약 40명의 선원을 남긴 후에 ‘이스파니올라’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1492년 12월 에스파냐로 귀국하였고,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귀국 장면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콜럼버스는 의기양양하게 왕국으로 향하였다. 물고기 뼈와 금 장신구로 머리 장식을 한 인디언들과 화려한 앵무새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새를 지니고 행진하는 이 용감한 모험가의 특이한 행렬을 보기 위해 농부와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하인들은 순금과 호박을 들고 그와 선장들의 뒤를 따랐다. 바르셀로나 왕궁에 그가 들어서자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이것은 이 나라에서 가장 저명한 귀족들만 누릴 수 있는 존경의 표시였다. 왕궁의 홀로 들어선 그가 페르디난도와 이사벨 앞에 무릎을 꿇자, 두 사람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여왕의 오른편에 앉아 모험담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그는 이때 신대륙에는 금광이 많다는 거짓말을 했다.
두 번째 항해는 1493년에 17척의 배와 1,200명의 인원의 대 탐험단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은 그의 선전을 믿고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선단이 히스파니올라 도착해보니, 1차 항해 시에 남겨 두었던 식민지 개척자들은 타이노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모두 살해되고 없었다. 콜럼버스는 여기에 식민지인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고, 토지는 모두 에스파냐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원주민들에게는 세금을 부과하고 경작과 금 채굴과 같은 부역을 명령하였다.

총 네 번의 콜럼버스 항해에서, 두 번째 항해 이후부터 왕과 여왕은 콜럼버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1498년의 세 번째 항해에서도 원하는 금은보화는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항해 도중에 히스파니올라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여러 차례의 갈등 끝에, 1502년 콜럼버스는 왕이 지원해준 작은 배 4척을 타고 마지막 항해를 떠났다. 동참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 항해에서도 금은보화를 찾지 못한 콜럼버스는 1년 동안 자메이카 해안에 갇혀 고생 하다가 1504년에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스페인 왕실은 항해에서 돌아온 그를 외면하였다. 그해 그를 후원하던 이사벨 여왕이 죽고 페르디난드 2세가 즉위하자 신하들은 그는 사기꾼이므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콜럼버스는 재산과 제독 직위를 압수당한 채 비참한 노년을 보내게 된다.
콜럼버스는 좌절한 가운데 관절염에 시달리다가 1506년 스페인 남부 바야돌리드에서 55세로 사망하였다. 에스파냐 왕실의 그 누구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유해는 수도원에 매장되었다가, 그가 남긴 유언에 따라 36년 뒤 아들 디에고가 총독으로 부임할 때 식민지 도미니카의 산토 도밍고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1795년 프랑스가 이 지역을 점령하자, 쿠바의 하바나로 다시 이장되었다. 1898년 쿠바가 독립하자 유골은 훼손을 우려하여 다시 스페인으로 운구되어 세비아 성당에 안치되었다. 세비아 성당에는 콜럼버스의 유언에 따라 매장 대신 아래쪽에 서있는 네 사람의 조각상이 관을 받들고 있는 청동 무덤이 만들어졌다. 조각의 네 사람은 14세기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의 왕이다. 콜럼버스는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고 싶지 않다. 내가 발견했던 히스파놀라 섬(도미니카)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의 일부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신대륙은 그의 이름 대신에 플로렌스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실 이 대륙에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에게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선언한 것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미 선사 시대부터 아시아인들이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이유로 이 글의 제목을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 소개한 콜럼버스’라고 붙였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항해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