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말피 해안도로는 꼬불꼬불한 데다 복잡해서 웬만한 솜씨로는 운전하기 힘듭니다. 우리 버스의 파스쿠엘라처럼 뛰어난 기술을 가진 운전사만이 버틸 수 있지요. 그는 여기서 겨우 12명밖에 안 죽였거든요.”
아말피 해안도로를 출발하기 전, 가이드 로베르토의 너스레에 미니버스 안에서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론 사실일 리 없는 농담이지만, 소렌토 반도 남쪽 절벽을 따라 50여 km나 이어지는 아말피 해안도로를 직접 경험해 보면 왜 이런 유머가 나왔는지 금세 이해하게 된다.
절벽을 따라 층층이 들어선 파스텔톤 집들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푸른 지중해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아찔하고 독보적인 경관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감상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도로 폭은 왕복 2차선이 무색할 만큼 좁고 연속되는 급커브에 여름철 관광객 차량까지 뒤엉킨다. 절벽 한쪽에 길게 서 있는 주차 행렬을 보고 ‘운이 좋았네’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바닷가 직벽과 산자락 깊숙이 집이 숨어 있는 ‘수직도시’ 특성상 차를 세울 곳 없는 주민들의 차량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언감생심. 여행객이 여유롭게 차를 세우고 풍경을 바라볼 공간을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일 수밖에 없다.
사실 여기뿐 아니라 유럽 대도시 웬만한 곳의 주차는 전쟁을 넘어 일종의 고행에 가깝다.
오죽하면 아내가 길을 가다 주차할 자리를 발견하면 남편에게 전화해서 차를 사 오라고 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아말피 역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예전 여행에서 렌터카 핸들을 직접 잡았다가 아름다운 풍경 대신 운전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주차 공간도 찾지 못해, 서고 싶었던 곳을 한두 곳 그냥 지나친 게 아니었다.
아말피에서의 ‘환상적인 드라이브(DRIVE)’가 아니라 ‘환장하는 드라이버(DRIVER)’였던 셈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방법을 바꿨다.
오전 8시 나폴리를 출발해 소렌토와 아말피를 거쳐, 돌아올 때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당일치기 투어를 선택했다.
운전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지중해의 절경과 그 속에 숨겨진 삶의 일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보다 중요한 ‘나만의 머스트 고’
아말피 해안에는 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실 여기뿐 아니라 어떤 곳은 세계 3대 야경, 세계 10대 불가사의 등 근거를 알 수 없는 순위가 정해진 곳들이 많다. 물론 이런 숫자와 순위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타인이 매긴 순위가 아니라, 여행객 스스로 가보고 싶은 곳을 정하고 찾아가며 하나씩 지워나가는 자신만의 ‘머스트 고(Must Go)’ 리스트다.

아말피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포시타노, 아말피, 라벨로, 프라이아노, 아트라니 같은 마을들을 만난다.
절벽 따라 빽빽한 알록달록 건물로 유명한 포시타노, 중세 해상공국의 역사를 품은 중심도시 아말피, 해발 350m에서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음악과 예술의 도시 라벨로 등 저마다의 매력이 넘친다.
이런 곳에서 순위는 더욱 의미가 없지만 의외로 오래 기억에 남는 곳은 가장 작고 조용한 마을 아트라니(Atrani)다.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더 이퀄라이저 3’의 메인 배경이 된 아트라니는 면적이 0.12㎢에 불과해 이탈리아에서 가장 작은 마을 중 하나로 꼽힌다.
많은 이들이 영화 속 배경을 포시타노로 오해하곤 하지만, 영화 제작진이 선택한 곳은 상업화된 포시타노가 아닌 아트라니였다.
좁은 골목길과 성당 돌계단, 주민들이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인사를 나누는 작은 광장처럼 소박한 일상이 살아 있는 이곳은 주인공의 평화로운 안식처로도 잘 어울린다.
결국 영화가 선택한 것도 ‘가장 유명한 곳’이 아닌 ‘가장 그곳다운 곳’이었다.

화려함 뒤에 숨은 절벽 위 명소와 유명 인사들의 흔적
영화뿐 아니라 아말피에는 유명 인사들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아말피의 대표적 5성급 럭셔리 숙소인 ‘호텔 산타 카테리나’는 절벽 위에 위치해 지중해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스위트룸으로 유명하다.
하룻밤에 1000만 원을 훌쩍 넘기는 이 화려한 보금자리는 과거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커플이 신혼처럼 뜨겁게 머물며 전 세계의 부러움을 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것은 진흙탕 싸움으로 끝난 이혼 소송의 씁쓸한 잔재뿐이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 부부 역시 이곳에서 낭만을 즐겼지만, 이후 불거진 스캔들과 정치적 시련, 대권 문턱에서의 고배 등 잔혹사가 이어졌다.
아무리 눈부신 절경과 럭셔리 스위트룸도 셀럽들의 다사다난한 운명까지 휴양시켜 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지중해 파도를 헤쳐 나간 나침반과 해상공국의 역사
아말피를 단순한 휴양지로만 보면 놓치는 것이 있다.
이곳은 한때 지중해의 바다를 지배했던 해상공국이었다.
아말피 항구 앞 플라비오 조이아 광장(Piazza Flavio Gioia)은 나침반의 발명자로 전해지는 인물의 이름을 딴 곳이다.
역사학계에서는 특정 인물의 실존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아말피 사람들이 자석을 활용한 항해 기술을 발전시켜 나침반을 상용화한 역사적 공헌은 인정받는다.
또한 나폴리만 건너편 카스텔람마레 디 스타비아(Castellammare di Stabia)의 왕립 조선소는 이탈리아 해군의 상징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범선’으로 불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호가 건조된 역사적인 장소다.
아말피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다에서 시작돼야 하는 이유다.
‘우유 산맥’과 화산재 토양에서 자란 노란 보물 ‘스푸사토’
그렇지만 결국 아말피에서 사람의 발길을 가장 오랫동안 붙잡는 것은 ‘노란 레몬’이다.
음료, 옷, 비누, 가방까지 온통 노란 물결이며 절벽 산비탈에는 계단식 레몬밭이 가득하다.
아말피의 대표 품종인 ‘스푸사토 아말피타노(Sfusato Amalfitano)’는 일반 레몬과 차원이 다르다.
크기가 2~3배에 달하고 양 끝이 뾰족하며, 두툼한 껍질 속에 강한 신맛 대신 고소하고 달콤한 풍미와 천연 에센셜 오일을 가득 품고 있다.
가게 앞 상인들이 이 커다란 레몬에 선글라스를 씌워놓고 ‘존 레몬(John Lemon)’이라 부르며 입담을 자랑하는 모습 또한 이 노란 마을이 전하는 유쾌한 풍경이다.
이 거친 절벽에서 최고의 레몬이 자랄 수 있는 것은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와 함께 베수비오 화산이 남긴 비옥한 토양 덕분이다.
풍부한 미네랄을 머금은 화산 물질이 섞인 토양은 아말피 레몬의 독특한 풍미를 빚어내는 자연의 선물인 셈이다.
농부들의 노고 역시 남다르다.
예로부터 소와 염소를 방목해 우유를 생산했던 데서 이름 붙은 ‘우유 산맥’, 즉 몬티 라타리(Monti Lattari) 산맥의 가파른 절벽 밭에는 기계가 들어갈 수 없다.
농부들은 직접 레몬을 따서 바구니에 담아 어깨에 메고 나른다.
겨울철 찬바람과 서리를 막고, 여름철 강렬한 햇빛에 껍질이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밤나무 기둥과 짚으로 만든 전통 덮개 ‘파글리아렐레(Pagliarelle)’를 씌우는 지혜를 발휘한다.
이처럼 수직 농업의 한계와 까다로운 노동력 때문에 아말피 레몬은 대량 생산이 쉽지 않다.
특히 ‘스푸사토 아말피타노’는 엄격한 지리적 표시 보호를 받으며 희소성과 가치를 더하고 있다.

괴혈병 예방약에서 ‘태양의 술’로…다른 쪽에서 ‘불량품’의 대명사로
과거 아말피 항해사들이 장기 항해 시 괴혈병(비타민 C 결핍증)을 예방하기 위해 배에 실었던 레몬은 오늘날 이 지역의 대표 식후주 ‘리몬첼로(Limoncello)’로 재탄생했다.
알코올 도수 25~32%의 리몬첼로는 과즙이 아닌 레몬 껍질의 에센셜 오일을 알코올에 우려내어 만든다.
흔히 ‘신의 눈물’이라는 전설로 소개되지만 실제로는 화산 토양 와인 ‘라크리마 크리스티’의 전설과 스토리텔링이 결합한 것으로 현지에서는 ‘지중해 태양의 향기를 담은 술’로 통한다.
재미있는 점은 아말피에서 황금 대접을 받는 레몬이 미국으로 건너가면 ‘불량품’이나 ‘결함이 있는 중고차’를 뜻하는 속어로 쓰인다는 사실이다.
이는 겉은 탐스럽고 상큼해 보이지만 막상 씹으면 어금니가 시릴 만큼 시다는 특성에서 유래했다.
여기에 카지노 슬롯머신에서 잭팟을 뜻하는 ‘7-7-7’이나 ‘체리’와 달리, 레몬 기호가 나오면 아무런 배당도 주지 않는 소위 ‘꽝’ 취급을 받았던 문화적 배경까지 더해졌다.
이 표현은 1960년 폭스바겐의 전설적인 역발상 지면 광고로 큰 화제를 모았다.
자사 차 사진 밑에 단 한 단어, ‘Lemon(불량품)’이라는 파격적인 헤드라인을 던진 것이다.
크롬 몰딩 장식에 미세한 불량이 있어 출고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차라며, 이런 하자품(Lemon)은 절대 고객에게 팔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결함을 숨기는 대신 당당하게 드러내 품질에 대한 자신감으로 뒤집은 이 역발상 광고는 지금도 광고사의 교과서적 사례로 꼽힌다.
이후 ‘레몬’이라는 단어는 광고를 넘어 경제학에서도 독특한 의미를 갖게 된다.
1970년 조지 아케를로프 교수는 ‘레몬 시장(Market for Lemons)’으로 정보 불균형을 설명했고, 이 연구로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레몬’은 이후 결함 상품을 뜻하는 경제학 용어로 자리 잡았고, 미국에서는 ‘레몬법(Lemon Law)’이라는 소비자보호법의 이름으로도 쓰이게 됐다.
같은 과일을 두고 한쪽에선 ‘해안의 노란 금’, 다른 쪽에선 ‘불량품’이라 부르니 세상의 언어가 참 흥미롭다.

아말피의 레몬이 일깨워 주는 참된 웰빙, ‘삶의 속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생수에 살짝 띄워 마시기 위해 레몬 하나를 샀다.
과연 이 레몬이 아말피 절벽 밭에서 온 진짜 스푸사토인지 궁금해지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시간과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더 앞선다.
거기에 시선이 닿자 지금 이 순간에도 아말피 해안의 미니버스에서는 수많은 로베르토들이 외지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지중해의 풍경과 노란 레몬을 두고 끊임없이 유쾌한 자랑을 늘어놓고 있을 것만 같다.
분명한 건 특유의 입담으로 그들이 건네는 이야기와 아말피 해안이 소리 없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한결같이 명확하다는 점이다.
그건 좁은 도로를 능숙하게 빠져나가는 운전사의 여유부터 영화 속 주인공이 잠시 쉬어가던 작고 고즈넉한 마을, 바다를 개척한 항해의 역사 그리고 절벽 위에서 햇빛과 바람을 견디며 천연의 향을 틔워낸 레몬에 이르기까지 이곳의 모든 것들이 내는 같은 목소리이기도 하다.
서두르지 말 것, 바다를 바라보고, 걸음을 늦추고, 자연이 준 좋은 음식을 먹고, 햇빛을 받고, 향기를 맡을 것. 그리고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결국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이 가파른 아말피를 찾아온 진짜 이유는 단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험난한 절벽 속에서도 자연과 타협하며 느리게 익어가는 ‘삶의 속도’를 잠시 빌려가기 위해서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