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 초 몽골을 국빈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울란바타르에 있는 이태준(1883~1921) 기념관을 방문하면서 한국 근대의학 도입기에 활약한 선각자 의사들의 삶에 관심이 모인다. 이태준 열사는 세브란스 2기 출신의 의사로 몽골에서 의술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독립운동가다.
현지 이태준 기념관은 2001년 몽골 정부로부터 부지를 제공 받아 조성된 ‘이태준 기념공원’ 내에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현대적 전시・교육 공간이다. 대한민국 국비 등 19억 6000만 원을 들여 2025년 기존의 목조 기념관을 대체했다. 앞서 2011년 8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목조 기념관 시절에 방문한 적이 있다.
드라마 같은 이태준 열사의 삶…몽골에서 활동하다 정치적 광풍 속 피살

이태준 열사의 삶과 활동, 그리고 죽음은 그야말로 극적이다.
1883년 11월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07년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해 약 3년 9개월만인 1911년 6월 제2회로 졸업해 의사가 됐다. 세브란스를 마치기 한 해 전 망국의 비극을 목격한 그는 이듬해인 1912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950)의 권유로 1914년 중국에서 몽골로 옮긴 뒤 울란바타르에 동의의국을 개원해 독립운동과 근대 의료활동을 병행했다. 몽골을 찾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교통 등 편의를 제공했으며, 신한청년당 대표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선생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우리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 열사는 몽골 마지막 대칸인 불교 군주 복드 칸(1869~1924, 1911~1919과 1921~1924 재위)의 주치의로 활약해 몽골 국가훈장도 받았다.
복드 칸은 청나라 칭하이성의 티베트족 거주지에서 태어나 몽골 고승이 환생한 것으로 인정받아 티베트 라싸에서 교육받고 몽골로 보내져 현지 티베트 불교 지도자를 맡았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외몽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몽골 대칸(군주)에 올랐다. 중화민국 군벌은 1919년 11월 외몽골에 대한 종주권을 다시 주장하며 침공해 복드 칸을 몰아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에 이은 적백내란 시절 시베리아에서 반혁명 백군을 이끌던 로만 표토로비치 웅게른슈테른베르크(1886~1921) 남작의 부대가 몽골에 들어와 중화민국 군대를 격퇴하고 1921년 2월 복드 칸을 복위시켰다.
하지만 웅게른슈테른베르크는 티베트 불교에 심취해 자신이 부처라는 망상에 빠지면서 복드 칸을 밀어내고 자신이 대칸에 올랐다. 스스로 ‘칭기즈 칸의 환생’이라며 대제국 건설을 꿈꿨다. 광기 어린 망상은 학살을 불렀다. 친위대를 조직하고 ‘환생을 통해 더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며 몽골인과 외국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웅게른슈테른베르크는 복드 칸의 부탁을 받은 몽골인 공산주의자와 러시아 적군에게 패배한 뒤 처형됐다. 이 열사는 몽골에서 벌어진 이런 광풍 속에 아쉽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1908년 의사 된 제중원 1기 7명 중 4명이 망명해 독립운동
이태준 열사 외에도 구한말 배출된 의사 중에는 개화정치·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선각자가 적지 않다. 일찍이 서구의 과학과 문물을 접한 초창기 의사들은 1910년 국권상실 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이들의 헌신은 독립운동사에서 단연 빛난다.
1908년 의사가 된 제중원 의학교 1기 7명 중 4명이 중국과 몽골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였을 정도다. 1기 김필순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결성한 정치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 활동하다 국권상실 이듬해인 1911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압록강에서 가까운 퉁화(通化)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1916년 북만주로 옮겼다가 급사했다.
같은 1기인 백정의 아들 박서양은 실력으로 세브란스 의전과 간호양성소 교수를 지냈다. 1기 졸업생에는 관기의 아들 주현도 있다. 합리와 이성이 바탕인 서양의 의학 지식·술기를 익힌 이들은 “과학의 피는 신분의 피보다 더 붉다”며 신분 차별의 폐해를 극복하고 능력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갔다.
첫 근대의사인 국립 ‘의학교’ 졸업생 중엔 단군 모시는 대종교 교주도

구한말 한국에서 양성된 첫 근대의사는 1902년(광무 6년) 조선 정부가 세운 ‘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유병필·김교준(金敎準) 등 19명이다. 서울대병원 역사문화연구소 김상태 박사의 연구 결과다. 앞서 대한제국은 1899년(광무 3년) 국립의과대학인 ‘의학교’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한국인 의사를 한국에서 양성하기 시작했다. 의학교 1기는 3년 동안 동물학, 화학, 해부, 약물, 내과, 외과 등 16개 과목을 이수하고 1902년(광무 6년) 7월에 졸업시험을 치렀다. 그해 7월 4일자 관보에는 1회 졸업생 19명의 명단이 실렸다. 외국에 유학하지 않고 한국에서 공부한 의사가 처음으로 탄생한 날이다.
관보에 1기 우등 졸업생 5명의 하나로 소개된 김교준(1884~1965)의 삶도 하나의 드라마다.
졸업 뒤 의학교 교관, 육군 군의, 무관학교 의관 등으로 일했다. 그는 1916년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 민족종교 대종교(단군교)의 2대 교주에 오른 김교헌(1868~1923)의 동생이다. 김교헌은 간도 지역 항일무장투쟁에 공헌했다.
김교준은 1910년 국권상실 뒤 형을 따라 만주로 이주해 동포를 위한 의료 활동과 대종교 포교, 그리고 항일무장투쟁 지원에 힘썼다. 해방 뒤에는 대종교 총본사를 국내로 옮기는 작업을 주도하고 교주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 뒤 원로원장을 거쳐 1962년 제5대 교주에 선출돼 2년간 맡았다. 국내에서 배출된 최초의 의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나중에 단군을 받드는 대종교 교주가 된 것이다.
의학교에서 김교준 등을 가르친 교관은 김익남 선생(1870∼1937)으로 1894~1896년 갑오개혁 당시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최초의 사립 의학교인 도쿄 지케이카이의학교(東京慈恵会医学校)에 유학해 1899년 졸업하며 근대 의사가 됐다. 이 학교는 1881년에 의학학습소로 설립돼 1891년 도쿄 지케이카이의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1903년 일본 최초의 사립의학 전문학교인 도쿄 지케이카이의학전문학교가 됐으며 1921년 도쿄지케이카이의대가 됐다. 김익남 선생은 의학교 교관으로 부임해 1902년 19명, 1903년 13명 등의 의사를 배출했다.
미국 의사 서재필은 한국인 중 첫 근대 의사…과거 합격자 중 유일한 의사

독립운동가 서재필(1864~1951)은 1893년 미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근대 의사가 됐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몸을 피했다가 의사가 되고 병리학자로 활동했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1886년 9월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베어의 해리힐맨고를 마친 뒤 워싱턴DC로 옮겨 육군 의학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컬럼비아대 야간부(현 조지워싱턴 의대)를 다녔다. 1893년 2등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돼 모교 병리학 강사로 일하다 개업했다. 미국에선 제이슨 필립이라는 이름을 썼다. 서재필은 한국인 최초의 근대 의사로 기록된다.
1882년 문과 별시에 병과 3등으로 합격한 서재필은 조선 시대 과거 합격자 중 근대 의사가 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1884년 12월 김옥균·박영효·서재필·홍영식 등과 함께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삼일 천하로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피신했다. 국내에 남은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 몰살당했다. 부모와 형,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동생은 참형을 당했으며 두 살배기 아들은 아사했다.
서재필은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병원 운영으로 모은 전 재산을 독립운동 기금으로 내놓았다. 이승만과 함께 미국 내 한인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광복 뒤 1947년 귀국해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을 맡다가 이듬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보고 떠났다.
한국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의 거름으로 삼은 근대사와 독립운동사에는 이처럼 의사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