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서서히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기억력 저하는 노화와 상관없이 어느 시점부터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기도 한다. 이러한 ‘가속 구간’의 정체를 규명한 대규모 국제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와 연계된 히브루 시니어라이프 힌다-아서 마커스 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국제 연구진은 노화 과정에서의 뇌 구조 변화와 기억력 저하 간의 관계를 분석해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 1월 14일자에 발표했다.
과학매체 사이언스데일리 등 보도에 따르면 연구진은 여러 국가에서 장기간 축적된 데이터를 통합, 13개의 독립적인 장기 추적 연구에 참여한 인지적으로 건강한 성인 3700명을 대상으로 분석했다. 총 1만 건 이상의 뇌 자기공명영상(MRI)과 1만3000건이 넘는 기억력 검사 결과가 포함됐으며, 연령대 전반에 걸쳐 뇌 구조 변화와 기억 수행의 연관성이 정밀하게 평가됐다.
분석 결과, 뇌 위축과 기억력 저하의 관계는 단순한 직선적 감소가 아니었다. 젊은 연령대에서는 뇌 구조 변화와 기억력 저하 사이의 연관성이 비교적 약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 관계는 점차 강화됐다. 특히 평균보다 빠른 속도로 뇌 구조적 손실이 진행된 사람들은 기억력 저하 역시 급격히 가속되는 양상을 보였다. 뇌 위축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기억력 감퇴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비선형적으로 악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억력과 가장 강한 연관성을 보인 부위는 전통적으로 기억 형성의 핵심으로 알려진 해마였다. 하지만 연구진은 해마 단독으로는 전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대뇌 피질과 피질하 영역을 포함한 다수의 뇌 부위에서도 구조적 위축과 기억력 저하 사이에 유의미한 연관성이 관찰됐다. 기억력 감퇴가 특정 부위의 국소적 손상이 아니라, 뇌 전반에 걸친 구조적 취약성이 누적된 결과라는 설명이다.
또한 이번 연구에서는 알츠하이머병의 대표적 유전적 위험 인자인 APOE ε4 보유 여부만으로 이러한 기억력 저하 패턴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도 확인됐다. 이는 정상 노화 과정에서의 기억력 감퇴가 특정 질환 유전자 하나에 의해 좌우되는 현상이 아니라, 보다 복합적인 생물학적 과정의 결과임을 의미한다.
연구를 이끈 알바로 파스쿠알-레오네 박사는 “이번 분석을 통해 노화 과정에서 뇌 구조 변화가 어떻게 누적되고, 그것이 기억력 저하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가장 정밀한 그림을 제시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기억력 저하는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개인의 생물학적 소인과 노화 과정이 결합되며 신경퇴행성 과정이 나타난 결과”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이번 결과가 기억력 저하를 ‘특정 뇌 부위의 문제’로 바라보던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 뇌 전체 네트워크 수준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기억력 감퇴는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누적된 구조적 변화가 임계점을 넘으면서 가속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연구에는 노르웨이 오슬로대, 덴마크 자기공명연구센터, 독일 막스플랑크 인간발달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대, 스페인 바르셀로나대, 이탈리아 밀라노대, 스위스 제네바대 등 유럽 주요 연구기관의 신경과학·심리학 연구진이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