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형태를 한 '휴머노이드' 로봇에게 수술도구를 부탁하는 수술실이 눈앞에 다가왔다.
삼성서울병원은 의료진의 음성 명령을 알아듣고 수술도구를 건네는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을 16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삼성생명 일원역빌딩 B동 9층에서 처음 일반에 공개한다고 9일 밝혔다. 1년여 동안 개발해온 로봇이 취재진 앞에 서는 자리다.
“메스 주세요”라고 하면?
이날 시연에서 가장 눈에 띌 장면은 로봇이 수술실 간호사 역할을 대신하는 모습이다. 1호 로봇은 집도의의 음성 요청을 알아듣고, 요청받은 도구를 집도의가 안전하게 잡을 수 있도록 손잡이 방향과 전달 위치를 조정해 건넨다. 사용이 끝난 도구는 다시 받아 정해진 자리에 정리하고, 남은 도구와 다음 요청 상황까지 파악한다.
정용기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단순히 도구를 한 번 전달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 수술이 진행될 때 사람에게 하듯 '요청–전달–사용–회수–정리'로 이어지는 도구 순환 과정을 완결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의사 손놀림 그대로 베끼는 로봇
또 다른 시연에서는 로봇이 직접 수술도구를 잡고 조직을 째고(절개), 벗겨내고(박리), 꿰매는(봉합) 과정을 선보인다.
집도의가 모니터를 보며 움직이면 로봇이 그대로 따라 한다. 배우 휴 잭맨이 출연한 영화 '리얼 스틸'에서 사람의 몸짓을 로봇이 그대로 흉내 내던 장면과 닮았다.
정 교수는 "아직 로봇 스스로 환자 상태를 판단하고 자동으로 수술하는 단계는 아니다"라며 "다만 숙련된 의료진이 조작 장치를 통해 로봇의 양팔과 수술도구를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다.
로봇 2대가 팀을 이루면⋯세계 최초 장면
이번 시연에서는 로봇 2대가 사람 의사와 함께 수술 과정을 나눠 맡는다. 삼성서울병원은 이런 3자 협업 시연이 세계 최초라고 밝혔다. 1호 로봇이 간호사 역할을 맡는 사이, 2호 로봇은 왼손으로 복강경 내시경을 쥐고 수술 부위가 화면 중앙에 오도록 시야를 조정한다. 오른손에는 수술용 집게를 들어 집도의의 지시에 따라 조직을 원하는 방향으로 당겨 젖힌다.
정 교수는 "하나의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이 내시경 시야와 조직 견인을 함께 담당하기 때문에, 수술 부위가 잘 보이도록 하는 동작과 필요한 수술 공간을 확보하는 동작을 서로 연계해 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장면은 개복·복강경 수술을 흉내 낸 모의 환경에서의 시연이며, 실제 환자를 수술하지는 않는다.
전 세계가 뛰어든 수술실 로봇 경쟁
휴머노이드 로봇을 수술실에 들이려는 시도는 세계 곳곳에서 이제 막 걸음을 뗀 단계다.
대만 폭스콘은 병원 안에서 약과 검체를 나르는 물류로봇 '누라봇'을 이미 운영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외과의사의 음성 명령에 따라 수술도구를 건네는 협동로봇 '스크럽봇'을 대만 타이중재향군인병원, 위안하이테크와 함께 개발해 올해 6월 컴퓨텍스에서 선보였다. 엔비디아의 로봇용 AI 플랫폼 '아이작(Isaac)'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수술 장면을 인식하고 상황 변화에 맞춰 다음 동작을 스스로 판단하는 기능이 적용됐다.
엔비디아와 폭스콘은 스크럽봇이 이미 수술실에서 쓰이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누라봇과 달리 어느 병원에서 얼마 동안 검증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의사의 음성 명령을 알아듣고 도구를 건네는 기능 자체는 해외에 먼저 나온 셈이다.
사람이 조작해 수술기구를 다루는 로봇도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UC샌디에이고 연구진은 7월 8일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사람이 원격 조종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돼지의 담낭을 절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한 차례는 로봇 2대만으로 수술을 마쳤다. 로봇 2대의 협업 자체는 이미 실제 동물 수술에서 검증됐다.
삼성서울병원이 강조하는 '세계 최초'는 로봇 2대에 사람 의사까지 더해 셋이 함께 움직이는 조합을 가리킨다. 다만 아직은 실제 수술이 아니라 모의 환경에서의 시연 단계다.
정 교수는 이 로봇의 강점으로 기존 수술실을 그대로 쓸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을 위한 별도 수술실을 구축할 필요 없이 기존처럼 사람을 위해 설계된 수술실과 기존 수술기구를 휴머노이드 수술보조로봇이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며 "상용화 이후 별도의 환경 변화 없이도 수술실 현장에 빠르게 적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5년짜리 국책과제⋯인력난 현장에 힘 보탠다
이 로봇 개발은 삼성서울병원이 2025년 한국형 ARPA-H 프로젝트 주관기관으로 선정되며 시작됐다.
삼성서울병원은 레인보우로보틱스, 에이딘로보틱스, 하해호, 삼성융합의과학원, 서울대, 국립암센터, 전북대병원과 컨소시엄 '오케스트라'를 꾸려 로봇을 함께 개발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이 지원하는 이 과제는 2025년 7월부터 2029년 12월까지 54개월간 진행된다. 정부 연구개발비는 138억3500만 원 규모다. 2026년 말 1단계 경쟁평가를 통과하면 2단계로 넘어간다.
정 교수는 "제한된 의료인력으로 수술을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숙련된 수술보조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야간·응급 및 필수의료 현장의 인력 공백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시연 마지막에는 개복수술을 흉내 낸 모의 환경에서 참가자가 로봇을 직접 조작해보는 체험 시간도 마련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