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망막질환이라도 어떤 유전자에 이상이 생겼느냐에 따라 치료와 유전상담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유전성 망막질환과 관련된 유전자가 300개를 넘어 정확한 원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과에서 흔히 찍는 망막 사진과 검사 결과를 인공지능이 분석, 원인으로 의심되는 유전자를 먼저 추려주는 방법이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서 효과를 보였다. 전문의가 혼자 판단했을 때 67.3%였던 상위 5개 원인 유전자 후보 적중률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자 88.5%로 높아졌다.
세브란스병원 안과 한진우·변석호 교수와 강남세브란스병원 안과 이준원 교수 등이 참여한 국제 공동연구진은 유전성 망막질환의 원인 유전자를 예측하는 AI 임상의사결정지원시스템 ‘Retina4IRD’를 개발하고 실제 진료에서 활용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14일 밝혔다. 연구 결과는 지난 7월 24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디슨(Nature Medicine)》에 게재됐다.
300개 넘는 원인 유전자…정확히 찾아야 치료 길 열려
유전성 망막질환은 유전자 이상으로 망막 기능이 떨어지는 희귀질환군이다. 망막색소변성증을 비롯한 여러 질환이 여기에 속한다. 일부 환자는 시야가 점차 좁아지거나 시력이 떨어져 심하면 실명할 수 있다.
원인 유전자를 알아내는 것은 병명 확인에서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 시력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고 가족에게 유전될 가능성을 상담하는 과정에서도 필요하다. 특정 유전자를 겨냥한 치료제나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있는지도 원인 유전자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에서 허가된 유전성 망막질환 유전자치료제 ‘럭스터나’는 모든 환자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E65라는 특정 유전자 변이가 확인된 환자만 치료 대상이다. 결국 어떤 유전자에 이상이 생겼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치료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원인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다. 유전성 망막질환은 관련 유전자가 많고 같은 유전자 이상이라도 환자마다 눈에 나타나는 모습이 다를 수 있다. 반대로 서로 다른 유전자 이상이 비슷한 망막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연구진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줄이기 위해 Retina4IRD를 개발했다. ‘Retina’는 망막을 뜻하고, ‘IRD’는 유전성 망막질환(Inherited Retinal Disease)의 영문 약자다.
Retina4IRD는 안저사진과 빛간섭단층촬영(OCT) 영상을 분석한다. 안저사진은 눈 안쪽 망막을 촬영해 이상 여부를 살피는 검사다. OCT는 빛을 이용해 망막의 단면 구조를 층별로 보여준다.
AI는 여기에 나이와 성별, 가족력, 증상이 시작된 나이, 유병기간 같은 임상정보도 함께 활용한다. 눈 사진만 보고 원인 유전자를 맞히는 방식은 아니다. 영상과 환자 정보를 함께 살피면서 원인일 가능성이 높은 유전자 후보를 추려준다.
연구진은 한국·중국·폴란드 9개 의료기관에서 유전자검사로 진단이 확인된 환자 1843명, 3376안의 자료를 이용해 AI를 개발하고 검증했다. Retina4IRD는 치료제가 있거나 임상시험이 진행 중인 유전자 등을 포함해 17개 유전자 범주 가운데 원인일 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제시한다.
연구진 자체 검증에서는 실제 원인 유전자가 AI가 제시한 상위 5개 안에 들어간 비율이 90.4%였다. 별도의 환자 자료로 다시 검증했을 때도 85.6%를 기록했다.

전문의 혼자서는 67.3%…AI 도움 받자 88.5%
연구진은 AI가 실제 진료에서도 도움이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유전성 망막질환이 의심되는 환자 300명을 두 집단으로 나눴다. 한쪽 전문의에게는 AI가 제시한 정보를 제공했고, 다른 쪽은 AI 없이 판단하도록 했다. 이후 유전자검사 결과가 확인된 295명을 최종 분석했다. 의료진이 환자의 원인으로 의심되는 유전자 5개를 골라본 뒤 실제 유전자검사 결과와 비교한 것이다.
AI의 도움을 받은 전문의는 실제 원인 유전자를 상위 5개 후보 안에 포함시킨 비율이 88.5%였다. 전문의가 혼자 판단했을 때는 67.3%였다.
가장 유력하다고 판단한 유전자 하나만 비교해도 차이가 났다. AI 보조군은 37.8%, 전문의 단독군은 22.4%였다.
AI가 유전자검사 대신하는 건 아냐
그렇다고 AI가 유전자검사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Retina4IRD는 유전자검사에 앞서 어떤 유전자를 우선 살펴볼지 의료진의 판단을 돕는 도구다. 최종적으로 어떤 유전자 변이가 질환을 일으켰는지는 차세대염기서열분석(NGS) 등 유전자검사로 확인해야 한다.
이번 연구에서 환자의 검사비가 실제 얼마나 줄었는지, 진단 기간이 얼마나 짧아졌는지까지 확인한 것도 아니다. 임상시험에서 확인한 핵심은 AI를 활용했을 때 전문의가 원인 유전자 후보를 더 정확하게 골라냈다는 점이다. 비용과 진단기간 단축 효과는 실제 진료에 적용한 뒤 추가로 살펴봐야 한다.
연구팀은 안과 진료에서 흔히 사용하는 영상과 임상정보를 활용한 AI 시스템의 유용성을 전향적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으로 확인한 세계 최초 사례라고 설명했다.
한진우 교수는 “Retina4IRD는 의사를 대신해 진단을 내리는 것이 아닌, 유전자 검사를 하기 전 가능성이 높은 원인 유전자를 먼저 좁혀주는 사전 선별 도구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불필요한 검사 비용을 줄이고 진단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물론 유전자 치료처럼 치료 시기가 중요한 환자를 조기에 선별해 정밀의료를 실현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