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7월 27일 (월)

[신간] 731부대는 왜 심판받지 않았나…의학의 흑역사가 만든 생명윤리

서울대병원 김옥주 교수, 나치 인체실험부터 헬싱키선언까지 80년 추적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생명윤리 역사》표지 사진=서울대병원

사람을 대상으로 연구하려면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연구 과정에서 안전과 권리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이런 원칙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치 인체실험과 일본군 731부대, 미국 터스키기에서 벌어진 비윤리적 매독 연구처럼 의학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사건을 겪은 뒤에야 하나씩 마련됐다.

서울대병원은 김옥주 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교수 겸 서울대병원 임상연구윤리센터장이 《생명윤리 역사》를 펴냈다고 21일 밝혔다.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체실험부터 2024년 개정된 헬싱키선언까지 현대 생명윤리의 80년 역사를 좇는다. 사건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의학과 과학의 실패가 어떤 반성과 제도를 낳았는지 차례로 보여준다.

오늘날의 생명윤리 원칙은 과학을 가로막는 규제가 아니라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만든 사회적 약속이라는 것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다.

실험 자료와 맞바꾼 면책…731부대 책임은 어디로 갔나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일본군 731부대다.

김 교수는 인체실험을 가능하게 한 제도적 배경부터 전후 미국과 일본 사이의 면책 거래, 도쿄재판에서 책임 규명이 무산된 과정까지 추적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국 군·정보 당국은 731부대 책임자 이시이 시로와 관계자들을 재판에 넘기지 않는 대신 생물학전 연구 자료를 넘겨받는 방안을 검토했다. 주요 관계자들이 기소되지 않도록 미국 당국이 움직인 정황을 담은 서신과 회의 기록도 남아 있다.

김 교수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을 직접 찾아 국내에 충분히 소개되지 않은 731부대 관련 1차 사료를 발굴하고 분석했다.

추적은 도쿄재판에서 끝나지 않는다. 소련의 하바롭스크 재판과 중국의 선양 전범 재판까지 살피며 끝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책임 규명의 역사를 되짚는다.

출판사 측은 731부대의 인체실험부터 전범 재판까지 전 과정을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다룬 국내 첫 저술이라고 설명했다.

치료제 나왔는데도 흑인 환자 방치…터스키기 연구의 교훈

터스키기는 미국 앨라배마주의 도시 이름이다. 미국 공중보건당국은 1932년부터 이 지역의 흑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매독이 치료되지 않았을 때 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찰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매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연구 내용과 위험에 대한 충분한 설명도 듣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치료제가 나온 뒤였다. 페니실린이 매독 치료제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지만 감염된 참가자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연구는 1972년 언론 보도로 실상이 드러난 뒤에야 중단됐다.

사건이 알려지자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후 1979년 발표된 벨몬트 보고서에는 연구 참여자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피해를 줄이며, 연구의 부담과 이익을 공정하게 나눠야 한다는 원칙이 담겼다.

책은 에이즈 위기가 임상시험 방식을 어떻게 바꿨는지도 살핀다. 유전자치료 임상시험 도중 숨진 제시 겔싱어 사건 이후 연구 참여자 보호제도가 강화된 과정도 소개한다.

미국 연구윤리 규정인 커먼 룰 개정과 유럽연합 임상시험 규정, 개인정보 보호제도의 변화도 이어진다.

한국의 경험도 세계 생명윤리의 흐름 속에서 다룬다. 2005년 황우석 당시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 연구팀의 줄기세포 논문 조작과 연구용 난자 제공 과정의 윤리 문제가 불거진 뒤, 국내 연구윤리와 생명윤리 제도의 허점이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책은 이미 시행 중이던 생명윤리법이 이후 어떻게 보완됐고, 임상시험심사위원회와 연구 참여자 보호제도가 의료 현장에 자리 잡았는지도 살펴본다.

2024년 헬싱키선언까지…윤리 기준도 시대 따라 변했다

헬싱키선언은 세계의사회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 연구에서 지켜야 할 윤리 원칙을 담은 문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비윤리적 의학 연구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 1964년 처음 채택됐다.

윤리 기준도 한 번 만들어진 뒤 그대로 머물지는 않았다. 의학과 기술이 달라질 때마다 선언도 거듭 고쳐졌다.

가장 최근 개정판은 2024년 10월 나왔다. 취약한 연구 참여자를 더 두텁게 보호하고 임상시험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했다. 연구에서 생기는 이익과 위험, 부담을 공정하게 나눠야 한다는 원칙도 한층 분명해졌다.

김 교수는 “생명윤리는 과학의 발전을 막기 위한 규제가 아니라 과학이 인간을 위한 것으로 남도록 하는 토대”라고 말했다. 그는 “유전자편집과 첨단재생의료 등 생명과학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오늘날, 현대 생명윤리 원칙이 어떤 역사적 경험 속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대한의사학회장과 한국생명윤리학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2004년부터 서울대병원 임상시험심사위원회와 연구 참여자 보호제도 구축에 힘써 왔으며, 세계의사회의 헬싱키선언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생명윤리 역사》는 학지사메디컬에서 출간했으며 총 512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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