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도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닥터스 씽킹’이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다.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어린 아기가 심한 폐렴으로 병원에 실려 왔다. 여러 병원균에 동시 감염된, 미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사례였다. 의사들은 선천적으로 면역체계가 무너진 SCID(중증복합면역결핍증)를 의심했고 아기는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버티며 온갖 정밀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결론은 뜻밖에도 단순했다. 희귀질환이 아니라, 극심한 영양실조였다.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자 아기는 서서히 숨을 고르고, 면역력을 되찾았고, 기적처럼 건강해졌다.
의사들이 하나의 진단에 꽂히면 얼마나 쉽게 실체적인 진실을 놓칠 수 있는지를 지적하지만,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영양’이 사실은 치료의 핵심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입원전담전문의로 일하기 전, 나도 소아 환자를 보다가 당황한 적이 있다. 열 살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는 아이의 키가 작다며 성장호르몬 치료를 원했다. 우선 저성장의 원인을 확인하는 여러 가지 검사를 처방하고 아이의 식욕이나 생활습관, 주변 환경을 물어봤더니 부모가 채식주의자였다. 아이 역시 계란이나 우유를 포함한 모든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고 철저한 채식만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호르몬이 아니라, 자라는 데 필수적인 영양이었다. 요즘처럼 먹을 것이 넘쳐나 영양 과잉을 걱정하는 시대에, 오히려 너무 쉽게 놓치는 관점이었다.
외과 병동에서 수술 환자를 돌보는 지금도, 환자를 보는 내 기준은 변함이 없다.
나는 매일 아침 회진 때 가장 먼저 이렇게 묻는다.
“식사는 좀 하셨어요?”
종종 환자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선생님은 왜 먹는 얘기만 해요? 수술하고 나서 더 중요한 것도 많잖아요.”
외과 병동이라면 수술 후 통증은 어떤지, 열은 안 나는지, 수술 부위 배액관에서 분비물은 잘 나오는지를 묻고 살피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식사 섭취량이 가장 직관적이고 중요한 임상지표다. 수술실에서 나온 환자가 하루 이틀 후 밥을 잘 먹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몸이 순조로운 회복의 궤도에 올랐다는 신호다. 그걸 확인하면 나는 비로소 안심한다.
수술 환자에게 식사는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다. 몇 숟가락의 미음이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환자에게는 그 어떤 명약보다 중요하다.
대장암 같은 소화기암 환자들은 더욱 그렇다. 암으로 생긴 통증이나 구토, 설사로 이미 지칠 대로 지쳤는데, 장 일부를 잘라내고 다시 이어 붙인 상태에서 음식물을 넘긴다는 것은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큰 부담이다.
‘정말 먹어도 괜찮을까?’
‘혹시 이 한 숟가락 때문에 수술 부위가 터지면 어떡하지?’
이런 불안감은 숟가락을 쉽게 들지 못하게 한다.
우리 병동에 입원했던 70대 대장암 환자도 그랬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심장병 때문에 수술 직후 중환자실에서 잠시 경과 관찰을 하긴 했지만 우리 병동으로 왔을 때, 혈압도 괜찮고 열도 안 나고 검사 결과도 양호했다. 겉보기에는 순조롭게 회복될 것으로 예상했다. 방귀가 나오고 물을 마시기까지는 별 문제 없었다. 하지만 식사가 문제였다. 수술 후 이틀째 미음을 딱 한입 드시더니 입을 굳게 닫아 버렸다.
“냄새만 맡아도 역해. 속이 울렁거려서 못 먹겠어.”
수술 후 장 마비를 걱정했으나 X레이나 피 검사는 정상이었고 장음도 잘 들렸다.
“수술은 잘 되었으니 안심하세요. 이제 힘내서 드셔야 빨리 회복하실 수 있어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지 않았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못 먹겠다는 거였다. 그렇게 사흘 동안 한 숟가락도 들지 못했다.
ERAS 가이드라인(수술 후 회복 향상 프로그램)에서는 수술 후 48시간 이내 조기 경구 섭취를 권고한다. 그래야 장점막의 위축을 막고 전신 염증 반응을 완화할 수 있다.
식사 대신 영양수액으로 하루 필요 영양 1400kcal를 맞춰 공급했으나 그 사이 허벅지 근육이 눈에 띄게 빠졌다. 기력이 떨어지니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못 먹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상처 회복은 더뎌지고, 면역력이 떨어져 감염 위험이 높아진다. 단순히 ”잘 드시라“는 격려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서둘러 영양집중지원팀에 협진을 의뢰했다. 의사, 전담 간호사, 임상영양사, 약사가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댔다. 보호자인 따님도 참석해 평소 환자의 식습관이나 기호를 공유했다.
“환자분이 드시고 계신 약을 검토해보니 마약성 진통제가 장 운동을 떨어뜨려 구역감을 일으키지는 않았을까요? 진통제 변경은 어떨까요?”(약사)
“따뜻한 미음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역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차갑고 냄새가 적은 누룽지 숭늉이나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조금씩 드시게 해보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열량은 거부감이 덜한 과일 맛의 영양음료로 채우도록 식단을 다시 짜보겠습니다.”(임상영양사)
“먹으면 배가 아플 것이라는 불안감이 크신 것 같아요. 식사 때마다 직접 곁에 앉아 말씀을 나누며 조금씩 드실 수 있도록 격려해볼게요.”(전담 간호사)
이 의견들을 종합해 환자 맞춤형 영양 처방을 내렸다. 진통제를 바꾸고, 환자 식단을 변경하고, 부족한 칼로리는 정맥 영양으로 보충했다. 보호자에게는 환자가 좋아하는 간식이나 반찬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는 막연한 응원이나 격려가 아니라, 환자 상태를 고려한 의학적 개입이었다.
변화는 바로 다음 날 나타났다. 저녁 회진 때, 환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 동치미 국물은 시원하니 괜찮았어. 숭늉은 조금만 더 푹 끓이면 좋을 것 같고.”
식판의 절반이 비어있었다. 식사를 시작하자 회복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는 침대를 벗어나 복도를 걷기 시작했고,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다. 입원 기간은 예상보다 조금 길어지긴 했지만, 퇴원 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잘 먹고 갑니다. 먹으니 살 것 같아요.”
로봇 수술과 인공지능(AI)이 등장하면서 현대 의학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환자를 회복으로 이끄는 가장 큰 힘은 여전히 입으로 들어가는 한 끼 식사다.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 끼 밥이 들어와야, 최첨단 치료도 비로소 회복으로 완성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병동 회진을 돌며 묻는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다. 환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인간적인 진료다.

<편집자주>
입원전담전문의(호스피탈리스트)는 병동에 상주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입원환자를 돌보는 의사를 말한다. 2016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입원전담의 제도는 2021년 본사업으로 전환되어 올해 꼭 10년을 맞는다.
‘호스피탈리스트 다이어리’는 이들이 병동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치료하고 퇴원시키며 하루하루 쌓아가는 작은 순간들의 기록이다. 환자와 보호자, 다른 의료진, 그리고 입원전담의 자신에 대한 고백까지, 이 연재(주1회)를 통해 병원 안에서 겪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대한입원의학회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