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 엄지 절단 수술 뒤 이 방법으로 치료하겠습니다.” -의사 A
“그 치료가 꼭 필요한가요? 제 경험으로는 효과가 없었어요.” -의사 B
“제 환자들은 오히려 그 치료 안 했을 때 빨리 회복됐습니다.” -의사 C
“그나마 효과가 있다고 해도 환자의 경제적 부담이 큽니다.” -의사 D
“그럼, 그 치료는 하지 말고 경과를 지켜 보시지요.” -의사 E
“아, 그렇네요. 논문만 믿었다가 하마터면….” -의사 A
경기 부천시 예손병원 9층 강당 ‘예손 홀’. 매일 아침 7시 50분 이 병원 의사 30여 명이 모여 이처럼 토론하며 환자를 위한 최선의 치료법을 찾는다. 모든 의사가 번갈아 가며 전날 수술 환자 20여 명의 경과와 예후 등에 발표하고 의논한다. 격론을 벌이다 논문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한다. 누구도 의견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고, 누구에게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주말과 공휴일 외에는 단 하루도 쉬지 않는다.

‘예쁜 손’이라는 뜻의 예손병원은 이처럼 성역(聖域)이 없다. 정형외과학회 회장과 이사장, 서울대병원 부원장을 지낸 ‘고관절 치료 대가’ 김희중 명예원장도, 대한수부외과학회와 대한미세수술학회 이사장, 세계수부외과학회연맹 사무총장 등을 지낸 ‘선천성 엄지 기형 치료의 세계적 대가’ 백구현 명예원장도 ‘열린 규칙’에 기꺼이 따른다. 병원을 설립한 김진호 대표원장도 자신이 익숙한 치료법 대신에 토론의 결과에 따랐다.
예손병원은 성역뿐 아니라, 교수급 전문의의 개인 연구실도 없다. 일반 사무실처럼 열린 공간에서 근무하며 궁금한 것에 대해 곧바로 앞이나 옆의 전문의에게 묻는다. 개원가에서는 흔한 의사의 ‘복수 전공(더블 메이저)’이 없는 드문 병원이기도 하다.
-‘예쁜 손 병원’은 성역, 개인 연구실, 더블 메이저가 없는 ‘3무(三無) 병원’인 것 같다. 김 원장이 인터뷰를 고사하다 겨우 응한 것을 보니, 적극적 마케팅을 포함해 ‘4무 병원’이기도 하고….
“우리 병원에선 내가 수술 서열 5위일 정도로 뛰어난 의사가 많다. 그러나 의사가 특정 치료의 명의로 포장이 되면 그 영향으로 안 해도 되는 치료를 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치료할 길을 안 보기 쉽다. 사람의 신체와 상황은 다 다르기 때문에 치료법도 다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사들의 생생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병원에서는 스승에게 거역하기 힘들지만 우리는 스승의 의견도 정답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서로 무엇이 가장 좋은 치료법인지 상의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이다. 주치의가 다른 의사의 의견을 듣고 첫 수술법을 바꾸는 때도 많고 나도 마찬가지다. ”
예손병원은 이처럼 치료법의 절대공식과 이것만 하라는 강요가 없다는 점에서 ‘5무 병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환자에 대한 보다 더 적절한 치료는 뛰어난 효과로 이어져 ‘환자 만족도 높은 병원’으로 소문이 났다. 병원은 손 접합수술과 관절 치료 두 분야에서 보건복지부의 전문병원 인증을 받은 첫 병원이 됐다. 365일 밤 10시까지 정형외과 전문의가 대기하며 한밤중 응급사고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이기도 하다.

-매일 7시 50분에 콘퍼런스를 시작하면 그 훨씬 전에 나와야 하는데, 지금처럼 정형외과 전문의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상황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전문의를 뽑을 때 ‘750 콘퍼런스’에 참석해야 하고, 1주일에 한 번꼴로 밤 10시까지 야간 당직을 서야 한다고 하면 일부 의사는 주저하기도 한다. 대학병원에서 전문의를 하다가 와도 3~6개월 진료와 수술 보조를 하며 배워야 한다. 그러나 750 콘퍼런스에 1, 2년만 참석해도 이 분야 누구보다 전문적인 의사가 될 수 있다. 또 우리 병원 의사는 양심에 따라 맘껏 진료하고, 연구할 수 있다. 우리 병원은 또 대학병원 교수에 버금가게 연수를 보낸다.”
-일부 신경외과, 정형외과는 인센티브제 때문에 과잉진료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예손병원에도 인센티브제가 있나?
“당연히 있다. 그러나 환자에게 불필요한 치료, 해가 되는 치료는 돈을 아무리 많이 벌 수 있어도 권유하지 않는다. 시스템을 통해 치료법에 대해 체크해서 환자에게 도움이 안 되는 치료는 못하게 한다. 이를 거부하는 의사를 내보낸 적도 있다.”
김 원장은 “아직까지 줄기세포 치료에 대해선 효과를 검증할 수 없어 못하게 하고 있다”면서 “자가혈소판풍부혈장(PRP) 주사 치료는 제한적 적응점을 두고 시범적으로 치료를 허가했으며 결과에 따라 어떻게 할지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증거 기반 치료는 환자 우선주의에서 왔다. 김 원장이 병원을 결심한 것도 환자 때문이었다.

김 원장은 인턴 때 흉부외과를 원해 2개월 동안 중환자실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당시 흉부외과 전공의 선배가 “나처럼 사는 것이 좋냐”는 말에 흔들렸다. 산부인과 선배의 “정형외과가 멋져!”라는 말에 방향을 틀어 보라매병원 정형외과에 자원, 두 달 동안 밤낮을 잊을 정도로 근무했다. 그러나 갈팡질팡 정원 조정의 희생양으로 서울대병원 전공의에서 떨어졌다. 마음을 추스를 겸 고향 대구에 갔다가 현대병원에서 근무하던 선배로부터 SOS를 받았다. 선배는 동료 의사가 빠져나가 혼자서 시도때도 없이 몰려오는 환자를 모두 감당하느라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 선배는 손 접합술에서 최고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환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김진호 원장은 그때 ‘손 수술’을 평생 세부전공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는 서울대병원에서 전공의를 마치고 상계백병원 조교수를 하면서 끊임없이 몰려오는 손 환자를 진료했다. 2002년 5월 금요일 밤까지 환자를 보다 토요일 약속이 있어 외부에 나갔는데 전공의로부터 “팔 위뼈가 부러지고 엄지가 잘린 50대 여성 환자가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병원에 들어가야 하나 망설이는 순간, 성형외과에서 치료를 한다는 연락이 왔다. 팔뼈 수술이 우선이었는데, 성형외과 의사가 손 접합수술만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을 때는 때가 늦었다. ‘주말이었어도 병원에 들어가야 했는데…”라는 자책감에 밤잠을 못자고 뒤척이다 손을 제대로 치료하는 병원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김 원장은 인천의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선배를 설득, 2005년 1월 예손정형외과를 개원했다. 그러나 첫날 환자가 15명이었다. 밤에 와서 보니까 차량이 많이 다녀 유동인구가 많다고 착각했는데 낮에 보니 사람이 안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그래도 두 의사가 번갈아 가면서 야근당직을 서며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6월에 갑자기 환자가 급증했다. 왜 이러지? 궁금증은 곧 풀렸다. 주변 대학병원 교수들이 스웨덴에서 유럽수부외과학회(FESSH)에 가면서 “혹시 응급환자가 오면 예손의원으로 보내면 된다”고 당부했던 것. 그때 온 환자들을 통해 입소문이 났다.
그러나 그때 다리가 잘려 온 환자와 함께 온 보호자의 울부짖음이 김 원장 삶의 또다른 징검다리가 됐다. 원래 절단수술로 끝내야 하는데, 무리하게 접합수술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수술은 잘 된 듯했지만 다음날 환자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콩팥기능이 뚝 떨어졌고 심장이 멈췄다. 두 의사가 번갈아가며 심폐소생술로 겨우 심장 박동을 일으키고 환자를 인근 종합병원 응급실로 보냈다.
“의욕만으로는 환자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어요. 응급상태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마취통증의학과와 내과 전문의를 보강해서 병원 시스템을 갖춰야겠다고 다짐했지요.”

예손의원은 개원 1년 10개월만인 2006년 11월 병원으로 뛰어올랐고, 그때 척추센터도 갖췄다. 2008년 관절센터, 2010년 족부 센터 등을 마련하며 규모를 확장했다. 지금까지 14만여 명을 수술하면서 보건복지부 ‘인증 의료기관’ 통과와 함께 수지접합, 관절치료 분야 전문병원 인증을 받았으며 산재보험 최우수 의료기관으로도 선정됐다.
이 병원에 방문하면 곳곳에서 환자 제일주의를 느낄 수 있다. 1층은 진료실 가운데에 영상촬영실이 있어 환자가 병원에 오면 빨리 엑스레이를 찍고 외래진료를 받도록 동선을 짰다. 병실 복도 폭은 무려 3m로 다른 병원보다 훨씬 넓다. 환자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도록 설정한 것. 3층 물리치료실에는 고가의 멀티 챔버 고압산소치료기를 구입했다. 당뇨발, 수지접합술, 심한 화상 치료 등 보험 적용이 되는 환자 외에 손발목 골절 환자와 수술 환자의 회복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시설을 매개로 인근 부천세종병원의 당뇨발 환자가 이 시설을 이용하고, 예손병원의 환자에게 중증 응급상황이 생기면 세종병원에서 치료하는 협진 시스템도 구축했다. 환자 중심주의에서 나온 '열린 아이디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