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 시민을 비롯해 영동지방 주민의 강릉아산병원에 대한 사랑은 특별합니다. 지방의료의 위기 속에서 이 소중한 병원을 지키고 발전시킬 방향을 찾았습니다.”
2021년 말 국내 최대 병원에서 대장 분야 ‘최고 칼잡이’로 전국에서 몰려오는 환자를 보던 명의가 돌연 지방의 병원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의료계가 술렁댔다. 일부 환자들의 얼굴도 백지장이 됐다. 그 의사가 최근 3연임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각 신문의 동정란에 ‘조용히’ 실렸다. 4년 동안 흔들리던 병원의 기둥을 붙잡아 세우고, 지방 병원의 생존 모델을 제시한 것을 인정받은 것.
유창식 강릉아산병원장(64)은 의사들이 줄줄이 떠나서 부임 1년 만에 심장 응급실 문을 닫아야 했던 아픔, ‘의정갈등’으로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들이 모두 병원을 떠나는 위기를 극복하며 지방병원 생존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강릉에 온 지 벌써 4년이 됐다. 외과의사로서 정점일 때 주로 퇴직 의사들이 원장으로 부임하던 병원에 발령받아 당혹스러웠을 것 같은데….
“2021년 가을에 박성욱 아산의료원장이 불러 ‘유 교수, 강릉 병원장으로 가야겠는데, 환자 진료에는 지장이 없겠지?’라고 물었다. 이전에 아내와 함께 강릉에 여행했을 때 ‘정년 마치고 이 병원 오면 좋겠다’고 얘기 나눈 적은 있지만 말문이 막히는 제안이었다. 박 원장께 ‘외과 체계 다잡아놓고 가면 안되겠느냐?’고 물으니, ‘강릉이 더 급하다’는 대답이었다. 후배와 제자 의사 7명이 수술하는 시스템을 갖춰 놓았기 때문에 내가 없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문제는 재발이 잦은 크론병 환자들인데 일부는 내 손을 잡고 울었다. 그래도 의료원의 판단을 믿고 짐을 쌌다.”
-첫 부임하니 어떻던가? 병원이 숲 속의 호텔처럼 아름답던데….
“강릉아산병원은 입원병동이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오션 뷰’와 대관령을 조망할 수 있는 ‘마운틴 뷰’로 이뤄진 멋진 병원이다. 깨끗한 건물과 시설, 최첨단 장비도 갖춰져 있다. 무엇보다 지역 주민이 성역처럼 여기고 절대적 신뢰를 보낸다는 것을 금세 절감할 수 있었다.”
강릉아산병원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사재로 출범한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설립자 뜻에 따라 농어촌 벽지 의료 봉사를 하다 종합병원의 필요성을 절감, 서울아산병원에 이어 문을 연 곳. 정 회장이 “현대 그룹의 비즈니스나 내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봉사 정신을 우선하라”며 아산이나 현대 이름을 넣지 않길 원해 서울아산병원의 첫 이름이 서울중앙병원이었던 것처럼 이 병원의 첫 이름은 강릉병원이었다.
정 회장은 자신의 호 아산(峨山)을 병원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인, 휴전선 너머 고향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따올 정도로 고향 강원도 사랑이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주민들은 ‘고향의 영웅’이 만든 병원을 자신의 병원처럼 여기고 있고, 더러 3층 로비의 정 회장 초상화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유 원장은 서울아산병원 암센터에서 다학제 협진 시스템을 만들었고, 암병원장을 맡아 이것을 의료계에 확산시킨 주인공으로 기억한다. 보건복지부를 설득해 다학제 진료의 수가를 인정받도록 했고… 강릉아산병원에도 이런 성과를 옮겨놓을 수 있었을 텐데….
“처음 왔을 때 서울아산병원처럼 ‘수술 잘하는 병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부임 전엔 지역 병원의 내적 한계를 예상했는데, 대부분 기우였다. 병원 임직원의 근무 역량은 뛰어났고, 이미 다학제 협진 시스템도 잘 기능하고 있었다. 로봇수술 장비 등 하드웨어도 서울의 웬만한 대학병원 못지 않게 뛰어났다. 환자 대기시간이 짧아 서울에서 1개월 기다려야 받을 수 있는 수술이 여기에선 1주만에 가능했다.”
유 원장은 “그러나 문제는 우리 병원보다는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에 있었다”면서 “지역 병원이 무너져가는 큰 흐름에서 병원의 생존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숙제였고 당장 전문의들이 떠나지 않게 지키는 것이 눈앞의 과제였다”고 말했다.
“수도권에서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지역의 사립대병원은 붕괴 직전이다. 코로나-19 때 녹초가 된 젊은 의사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의정 갈등은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돼 수도권 병원들이 진공청소기처럼 지역 병원 교수들을 흡수하고 있다.”
강릉아산병원에선 심장내과 전임의 6명 중 4명이 줄줄이 떠나 2명만으로는 24시간 진료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왔다. 취임 1년째인 2023년 1월 유 원장은 휴일과 야간 심장응급실 문을 닫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역 전체가 들썩였으며 원성이 자자했다. 병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위기였다.
유 원장은 현실을 냉철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떠난 의사에게 사명감으로는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니, 멀리 해답이 보였다. 문제는 실천이었다. 유 원장은 우선 강릉시에 SOS를 쳤다. “지역 복지 예산을 병원에 쓰는 것이 최고의 복지”라고 설득했다.
시에서는 “당장 도와주고 싶지만 예산 지출 근거가 약하다”고 고민했다. 유 원장은 시와 상의하며 강원도청에 노크했다. 김진태 강원도지사에게 면담을 요청해 위급한 현황을 설명하고 도의 지원을 요청했다. 강원도 행정부원장을 단장으로 대책위윈회(TF)가 꾸려졌다. 도가 20%, 강릉아산병원에 환자를 보내는 9개 시군이 합쳐 80%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문의 지원비를 마련했다. 병원에선 전국의 심장내과 전문의들을 접촉해 한두 명씩 충원, 마침내 2024년 11월 심장응급실의 문을 다시 열었다. 강원도 언론들은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며 이 사실을 보도했다.
강릉아산병원은 소아청소년과에도 매년 지자체로부터 8억 원씩 지원을 받게 돼 내년부터 소아청소년과도 24시간 진료 체계를 가동하게 된다.
유 원장은 “이 같은 ‘필수의료 인력 확보 선제적 모델’은 다른 시도에서도 본받을 정도”라면서 “공공의료와 필수의료 확보는 이처럼 지역 특성을 반영한 예산 투여로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말했다.
강릉아산병원은 이와 함께 원로 의사를 영입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 병원은 △강릉의 멋진 주거 환경 △섭섭하지 않는 예우 △병원의 우수한 진료환경 등으로 설득해 서울아산병원에서 소아심장 진료의 명의 김영휘(소아청소년과), 뇌졸중 분야 권위자 김종성(신경과), 담췌장 내시경역행췌담관조영술(ERCP)의 대가 이성구(소화기내과), 척추수술 권위자 노성우(신경외과), 신생아 관리의 권위자 김기수 교수(소아청소년과) 등을 영입했다. 국내 다른 병원과 해외에도 레이다를 돌리고 있다. 2022년 9월 미국과 캐나다에서 뇌졸중 분과전문의로 활약하고 있던 최영빈 박사를 스카우트해 뇌졸중 집중치료실을 고도화, 지난해 7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뇌졸중 적정성 평가에서 1등급을 받았다.
“지금 강릉아산병원은 강원 고성군에서 경북 울진군까지 주민의 건강을 챙길 뿐 아니라 일부 과에는 수도권, 해외에서도 환자가 온다. 1년에 100억~200억 원의 적자를 보고 있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정부나 지자체가 주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필수의료의 빈 틈을 메워 주기만 해도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
강릉아산병원은 내년 개원 30년을 맞는다. 공자가 말한 ‘똑바로 서 흔들리지 않는 시기’인 이립(而立)에 이르는 것. 유 원장은 병원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암 치료 경쟁력에서 수도권 대형병원을 뛰어넘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24시간을 25시간처럼 쓰고 있다. 필자의 눈에는 지자체와 병원의 협력 토대 위에서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유 원장에게 인터뷰를 위해 강릉에 왔다가 만난 지인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고 정주영 회장께서 천국에서 보신다면 고향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강릉아산병원을 무엇보다 자랑스러워 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