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에 치이고 성과를 좇으며 지내느라 받은 온갖 스트레스를 무엇으로 풀까? 개인 시간 중 상당 부분을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에 빠져서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음주 등 쉽게 접근 가능한 다른 활동도 널려 있다. 현대인이 많이 선택하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과 가장 거리가 먼 활동이 명상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정신건강에 명상만큼 도움이 되는 활동도 드물다.
영상과 알코올 등 중독 대상은 빠져들기는 간단하다. 하지만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즉, 그 상태에 주저앉아 머물기 쉽다. 반대로 명상은 접어들기가 어렵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다른 명상의 난도에 비추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는 쉽다. 그냥 달리면 된다. 달리다가 보면 선(禪)의 경지에 오른다고 하니, 몸도 건강해지는 데다 덤으로 정신도 맑아지니 얼마나 좋은가.
러닝 붐이 일면서 ‘달리기의 과학’이 단행본과 기사, 영상으로 널리 공유되고 있지만, 러너스 하이를 둘러싼 자욱한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요컨대, 국내에 알려진 ‘러너스 하이’는 대부분 실체와 동떨어져 있거나, 조금씩 빗나가 있다.
“에이, 그런 게 있겠어요? 멋지게 표현한 거겠죠.”
본론에 들어가기 전, 잠깐 해소해야 할 인식이 있다.
“러너스 하이가 있겠어요? 그냥 하는 말이겠죠. 달리고 나서 샤워하고 나면 기분이 더할 나위가 없이 좋잖아요. 그 상태를, 좀 멋지게 표현한 거 아니겠어요?”
여러 해에 걸쳐 마라톤 풀코스를 여러 차례 완주했고 평소에도 즐겨 뛰는 러너 중에서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아니다. 러너스 하이는 분명히 있다.
‘극심한 고통 뒤에 오는 쾌감’은 러너스 하이와 달라
첫째 오해는 러너스 하이가 극심한 고통 뒤에 오는 쾌감이라는 설명이다. 필자가 쓴 《나는 달린다, 맨발로》에서 재인용하면, “마라톤에서 가장 힘든 시점인 35㎞ 지점쯤에서 (중략) 고통을 잊고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는 설명이다. 우리 뇌가 고통을 보상해주기 위해 러너스 하이를 선사한다는 것이다.
러너스 하이의 전제 요건에 고통은 없다. 나는 자주 경험해보지는 못했으나, 여러 차례 이 주선(走禪), 즉 달리면서 하는 명상을 맛봤다. 그 경지는 고통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달리다 보면 문득 찾아온다. 내가 경험한 구간은 대개 20~30㎞였다. 요컨대, 고통 뒤 오는 쾌감도 있고, 의학적으로 규명됐다. 그러나 그건 러너스 하이와 다르다.
“뛸 때도 맛보고, 마친 뒤에도 느낀다”는 절충형
둘째 오해는 ‘절충형’이다. 러너스 하이가 뛸 때에도 찾아오고, 달리기를 마친 다음에도 온다고 주장한다. ‘정신과 의사가 말하는 달리기를 통해 얻는 것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마음의 힘이 필요할 때 나는 달린다》가 그렇게 설명한다. 노인의학을 전공한 달리는 의사가 쓴 《저속노화 마인드셋》에도 같은 주장이 나온다.
두 책의 설명을 섞어서 요약하면 이렇다. “달리다 보면 힘이 안 들고 저절로 뛰어지는 것 같은, 마치 진공을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생각이 고요해지며 호흡은 부드러워진다. 러너스 하이는 뛰고 나서 또 한번 찾아온다. 이번에는 가벼워진 마음에 행복이 밀려온다.”
아니다. 러너스 하이는 달리기를 마친 뒤 느끼는 기분과 크게 다르다. 러너스 하이는 뛰는 도중에 받는 선물이다.
이제 러너스 하이의 실체를 신뢰할 만한 자료를 뒷받침하면서 설명한다. 일부는 앞에서 인용한 표현과 겹치지만, 지금부터 인용하고 나누는 상태가 러너스 하이에 대한 온전한 설명이다. 러너스 하이는 몸과 마음에 동시에 찾아온다는 것이 특징이다.
몸은 미끄러지는 듯하고, 정신은 무아지경
이를 가장 잘 표현한 책이 스포츠 심리학자 제리 린치와 스포츠 의학자 워런 스코트가 쓴 《나를 향해 달린다》이다. 이들은 몸에 대해 “기름 쳐진 홈과 같은 곳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것처럼 달린다” “추진력을 유지하는 데 어떤 에너지도 들어가지 않는 것 같고 마치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은”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에 대해서는 “무아지경”이라고 표현한다. 독일 외무장관을 지낸 마스터스(일반인) 마라토너 요슈카 피셔는 《나는 달린다》에서 “머리는 명상을 할 수 있는 평정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바로 이때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마치 스스로 기어나오듯 연속적으로 떠오른다”고 들려줬다.
심신에 동시에 찾아오고, 멈추면 날아가
이처럼 러너스 하이는 심신이 하나가 되는 경지다. 따라서 뛰는 동안에만 느낄 수 있고, 달리기를 멈추면 이내 날아간다. 이는 둘째 오해를 반박하는 추가 근거가 된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러너스 하이의 상태는 두 책의 표현과 일치한다. 여기에 덧붙이면, 마음은 한없이 평안한데, 자신감이 차오른다. 그 상태에서는 늘 ‘이번엔 신기록을 세우겠군’이라고 확신에 가까운 기대를 품는다. 또 호흡이 편안하고 길어지며, 가슴 아래로 내려온다. 가까운 소리, 내 숨소리와 발소리, 가까이에서 달리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실제보다 크게 들리는 데 비해 다른 소음은 뭉뜽그러져서 전해지는 백색소음처럼 웅웅거린다.
필자는 누구보다 산만하다. 집중하고 몰입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었다. 명상을 통해 고요한 경지에 오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러너스 하이에는 간혹 접어들었다. 달리기는 명상에 이르는 가장 쉬운 길이다.






